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8)
수수꽃다리
― 서정춘
자기 몸의 암향을
아꼈다가 조금씩
꽃 벌에 들켜버린
사춘기들아
저년들 생살에
벌을 쏘이면
시집 빨리 간댔더니
왁자지껄 사라지는
여동생들아
한반도 북쪽에 자생하는 우리 꽃 ‘수수꽃다리’는 흔히 ‘라일락’이라 부르는 ‘서양수수꽃다리’와 매우 유사하다. 물푸레나무과의 ‘수수꽃다리속(Syringa)’은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이던 1947년, 미군정청 소속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라는 사람이 북한산과 도봉산 등지에 자라고 있던 ‘수수꽃다리속’의 또 다른 종인 ‘털개회나무(또는 정향나무)’의 종자를 채취,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했는데 당시 자료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미스 김’의 이름을 따서 ‘미스김 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 나무가 1970년대 역수입되어 ‘서양수수꽃다리(라일락)’와 더불어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7, 80년대의 ‘수수꽃다리’ 즉 ‘라일락’ 향기는 대학 캠퍼스를 떠올렸다. 그만큼 낭만이 깃든 꽃향기이다. 시를 읽으면 그 향기에 끌려 꽃나무 주위에 모여든 소녀들이 보인다. 꽃송이에는 꿀벌들이 날아들고…… 향기에 취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소녀들이 벌이 왕~~하고 날으니 깜짝 놀라 흩어진다. 벌에 쏘이면 시집을 일찍 간다고…… 누가 그런 말을 만들어냈을까. 참 재미있다. 그런데 ‘꽃 벌에 들켜버린 / 사춘기들‘이지만, 꽃 벌에 쫓길 때에는 ’여동생들‘이 된다. 사춘기들보다는 여동생들이 감정적 거리가 가깝지 않은가. 화자의 감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서정춘의 시를 읽으면 한 폭의 그림과 함께 종종 한 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수수꽃다리>도 마찬가지이다. 향기가 좋기로 따지자면 순위에 빠지지 않는 우리 꽃 ‘수수꽃다리’와 함께 벌과 소녀들을 등장시켜 이렇게 멋진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5월의 ‘수수꽃다리’ 주변 풍경이 정말 ‘왁자지껄’ 낭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이 시의 매력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수수꽃다리’와 ‘서양수수꽃다리(라일락)’ 혹은 ‘미스김 라일락’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알아두자. 우리 이름은 ‘수수꽃다리’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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