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104)
담쟁이 덩굴
― 사랑을 위한 각서 5
― 강형철
달빛 빛나는 밤
온몸으로 시멘트 담을 움켜쥐고
간신히 기어오른 저 하늘 끝
늦은 밤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나를 위한 한마디
잠언
나는 온몸이 뿌리다.
밤이다. 담쟁이는 있는 힘을 다해 수직의 시멘트 담을 기어오른다. 끝내는 담 끝에 도달하여 골목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때 담 넘어 골목길에는 내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눈 앞에 그런 광경을 연상할 수 있는 풍경이다. 여기까지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그러나 다음 행에서 시인은 우리들의 가슴을 후벼판다. ‘이 놈아 정신차려!’라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술에 취해 그렇게 비틀거리냐고 꾸짖는다. 왜냐하면 ‘온 몸이 뿌리’인 담쟁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온 몸으로 수직의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고 야단을 친다.
담쟁이덩굴을 보며 어떻게 담쟁이는 ‘온 몸이 뿌리’라고 생각했을까.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명제이다. 시인의 눈은 이렇게 일반인도 느끼고 있을, 그러나 뭐라 표현하지 못했던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여 명료하게 말해준다. 독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자신을 향한 잠언을 곱씹게 된다.
이 시를 처음 읽던 날, 뒷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
△ 대학 동문 모임에서 강형철 시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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