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208)
홍연(紅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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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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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이 진흙 속에서 그냥 피어난 줄 아니
뿌리 속에 연탄구멍처럼 뚫려있는 터널을 봐
냄새나는 고요와 싸우며
불길을 제 속으로 말아 넣고 산 흔적이지
들숨만으로 견뎌온 것들은
제 안에 터널 몇 개쯤은 갖고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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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빗줄기에도 뿌리 뽑힐 두려움에
제 큰 잎을 벌려 빗물을 받아내는 저 동물성을 봐
물렁물렁한 생을 딛고
흔들리지 않으려 바닥을 움켜잡고 버틴 울음이지
직립이 아닌 수평으로 발을 뻗쳐가며
게걸음으로 바닥을 기어다닌 비굴함이지
비온 뒤 더욱 붉어지는 저 핏빛 울음 좀 봐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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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프로테아목 연꽃과의 여러해살이 수초로 아시아 남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진흙 속에서 자라면서도 청결하고 고귀한 식물로 연못이나 논밭에서 재배하는데, 꽃은 7∼8월에 피는데 홍색 또는 백색이다. 석가모니가 연꽃을 따서 들고 대중들에게 보였는데 가섭(迦葉)만 그 의미를 알고 미소로 답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마음에서 마음으로 도(道)를 전한다는 뜻의 ‘염화시중(拈華示衆)’이란 말에서 보듯이 연꽃은 불교의 정신세계와 불자들의 부처를 향한 신앙심을 짙게 투영하고 있는 상징적인 꽃이라 할 수 있다.
문숙의 시 <홍연(紅蓮)>에는 제목 그대로 붉은색 연꽃의 아름다움 이면에 있는 시련을 풀어낸다. 시 속 화자는 첫 행에서 ‘연꽃이 진흙 속에서 그냥 피어난 줄 아’냐고 묻는데 이는 그냥 피어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한 송이 국화꽃이 피어나기까지 소쩍새의 울음, 천둥의 울음, 무서리…… 가 있었다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떠오른다. 즉 첫 행은 한 송이 연꽃이 피기까지 여러 시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시련은 어떤 것일까. 연뿌리를 보면 구멍이 있는데 화자는 이를 ‘연탄구멍처럼 뚫려있는 터널’이라 한다. 화자는 그 터널을 ‘냄새나는 고요와 싸우며 / 불길을 제 속으로 말아 넣고 산 흔적’이라 인식한다. 즉 연꽃이 피기 위해서는 냄새나는 고요와 싸워야 했고 불길 속에 제 몸을 던져야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들숨만으로 견뎌온 것들은 / 제 안에 터널 몇 개쯤은 갖고’ 산다고 한다. 날숨은 내 뱉는 숨이요 들숨을 들이키는 숨이다. 그러니 뭔가 자신의 시련이나 자기주장을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고 온갖 불만이나 고통을 안으로만 넣어 참고 견디었기에 아름다운 연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 인내가 가슴에 구멍 뻥뻥 뚫리게 만들었으리라.
여기서 화자는 잎의 역할도 강조한다. 연꽃은 식물이지만 연잎은 동물성 기능을 한다는데, ‘작은 빗줄기에도 뿌리 뽑힐 두려움에 / 제 큰 잎을 벌려 빗물을 받아내는’ 행위가 그렇다고 한다. 이를 다시 ‘물렁물렁한 생을 딛고 / 흔들리지 않으려 바닥을 움켜잡고 버틴 울음’으로 해석한다. 나아가 ‘직립이 아닌 수평으로 발을 뻗쳐가며 / 게걸음으로 바닥을 기어다닌 비굴함’으로 본다. 이 비굴함 역시 앞 연에서 말한 인내이리라.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뎌내는 행위를 ‘비굴함’이라 했는데 이는 역설이다. 그 비굴함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않았으리라. 참고 견뎠기에 ‘비온 뒤 더욱 붉어지는 저 핏빛 울음’으로 연꽃이 피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화자도 ‘홍연’을 보며 ‘저 핏빛 울음 좀 봐봐’라 감탄하지 않았겠는가.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남모른 시련이 담겨 있다. 그런 시련을 참고 이겨냈기에 오늘날의 성공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연꽃, 그 중에서도 화자는 ‘홍연’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홍연은 ‘바닥을 기어다닌 비굴함’을 이겨내느라 ‘들숨만으로 견뎌온’ 가슴속에는 ‘연탄구멍처럼 뚫려있는 터널’이 생겼다. 그리고 ‘빗물을 받아내는 저 동물성’과 ‘바닥을 움켜잡고 버틴 울음’으로 시련을 견뎠다. 여기서 ‘비온 뒤 더욱 붉어지는’은 바로 그런 시련을 이겨낸 홍연의 삶을 대변한다.
마지막 구절, ‘핏빛 울음’은 그 시련을 참고 견디며 들숨만으로, 속으로만 삭인 결과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에 그 색이 핏빛이라는 뜻이리라. 참고 참았던 것이 어느 순간 꽃으로 피어 날 때 그 환희가 핏빛으로 화한 것이리라. 내 눈에는 그저 붉은 한지를 펼쳐놓은 듯한 아름다움만 보였는데 시인은 그 아름다움 이면의 시련, 홍연의 삶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의 눈 - 바로 통찰력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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