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143)
구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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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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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꽃잎이며 잎새들
퇴색으로 무너지는 가을 들판에
저만 홀로 하얀 소복으로 서 있는
구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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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내 친구의 마누라쯤 되나?
마주 대하기 난감한 거리를 두고
새하얀 슬픔으로 정갈하게 정장한 채
눈물 나는 이 계절의 문간 앞에 서서
다소곳이 고개 수그리며 날 마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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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꼭 그런 문상길 같은
어느 가을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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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말하는 들국화는 식물의 종 이름이 아니라고 한다. 들에 피는 국화과 꽃을 뭉뚱그려 그냥 ‘들국화’라 부른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쑥부쟁이, 개미취, 벌개미취 그리고 구절초이다. 이 중 구절초는 우리나라 각처의 산과 들 햇살이 잘 비치고 물이 잘 빠지는 곳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으로 줄기가 곧게 서고 잎은 어긋나며 둥근 타원형 꼴로 톱니처럼 잘게 갈라져 있다. 포기에는 대부분 잔털이 있는데 9~11월에 흰색 혹은 연한 분홍색 꽃이 가지 끝에 하나씩 핀다. 짙은 국화 향기가 나서 관상용으로 뜰에 많이들 심기도 하며, 꽃을 따 약용으로 쓰기에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채취한 것이 가장 약효가 좋다 하여, 줄기가 중양절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는 뜻의 구(九)와 중양절의 절(節)자를 써서 ‘구절초’라고 한단다.
이수익의 시 <구절초>에서 시인은 이 꽃을 소복 입은 여인으로 보고 있다. 붉고 노란 빛, 흔히 단풍이란 말로 표현되는 가을 풍광 속에 홀로 흰색을 띠고 있기에 더욱 도드라져 그렇게 본 모양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저 꽃잎이며 잎새들 / 퇴색으로 무너지는 가을 들판에 / 저만 홀로 하얀 소복으로 서 있는 / 구절초’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소복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죽은 내 친구의 마누라쯤 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주 가까운 사람, 그러나 죽고 없는 친구의 부인이다. 그러니 꽃이 시인과는 ‘마주 대하기 난감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즉 죽은 친구의 부인, 게다가 소복을 입고 있는 것이니 시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하얀 슬픔으로 정갈하게 정장한 채 / 눈물 나는 이 계절의 문간 앞에 서서 / 다소곳이 고개 수그리며 날 마중’한다. 배웅이 아니라 마중이다. 즉 맞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흰색이라고 모두가 소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구절초만 흰색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절초를 보고 있을 때 혹은 이 시의 시상이 떠올랐을 때 시인의 감정이 어땠기에 소복으로 환치시키게 되었을까. 정확한 이유야 시인만이 아는 것이지만 결실과 풍요의 계절인 가을을 ‘눈물 나는 이 계절의 문간 앞’이 한 구절에서 보이듯 혹여 어느 지인의 문상길에 나섰다가 구절초를 본 것이 아닐까. 아니면 어느 빈소에서 흰 국화로 장식된 영안실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뇌리에 남아 구절초를 보며 문득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아니 정말 친구의 빈소에 가서 만난 친구 부인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구절초를 본 때를 ‘아,’라는 감탄사나 ‘꼭’이라는 부사까지 붙여 ‘그런 문상길 같은 / 어느 가을 아침’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분명 구절초를 소복으로 환치시킨 데에는 단순히 가을빛 - 단풍 속에 확연하게 눈에 들어오는 흰색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종종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기분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하지 않는가. 시를 읽다가 나는 왜 시인이 지금 무슨 상을 당했다거나 아니면 영안실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까. 구절초를 보며 나는 소복이란 이미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럴 것이다.
구절초 - 매년 가을이면 만나는 아름다운 들꽃. 시인 덕분에 구절초 그 흰빛이 소복을 입은 여인 되어 더욱 흰빛으로 하얗게 하얗게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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