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146)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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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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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새바람 세차도
느린 춤을 추는 느긋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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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꽃 보듬고
서서 죽은 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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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 같은 젊은 날
추억 속에 묻어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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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만 먹고도
겨울 나는
하얀 노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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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전국 산야의 햇빛이 잘 드는 풀밭에서 큰 무리를 이루고 사는 대형 여러해살이풀이다. 줄기는 마디가 있는 속이 빈 기둥모양이고 곧게 서며 키가 1~2m 정도 된다. 굵고 짧은 땅속줄기가 있으며, 여기에서 줄기가 빽빽이 뭉쳐난다. 예전에는 불쏘시개로 많이 썼지만 부엌이 개량된 지금은 농촌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는 풀로 공원이나 산보길에 관상용으로 많이 심기도 한다.
이돈희의 시 <억새>는 우리가 놓쳤을지도 모르는, ‘억새’의 특성을 재정립해 놓고 있다. 즉, ‘억새’ 예찬이다. 아주 약한 바람에도 억새는 줄기만이 아니라 꽃도 흔들린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그렇지 않다. 세찬 높새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시인은 ‘느린 춤을 추는 느긋함’으로 본다. 가을이면 억새꽃은 하얗게 말라버린다. 이를 시인은 ‘마른 꽃 보듬고 / 서서 죽은 풀’이라 인식한다. 서서 죽다니?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결연한 저항의식이 아닌가.
살아가며 왜 젊은 날을 추억하지 않겠는가. 억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그 추억에 매달리지는 않는다. 억새는 ‘청대 같은 젊은 날’을 그냥 ‘추억 속에 묻어 버’린단다. 그리고는 ‘바람만 먹고도 / 겨울 나는 / 하얀 노후’가 바로 억새이다. 식물이니 이슬이라든가, 광합성이라든가 뭔가 양식이 있을 것이지만, 그저 불어오는 바람만 먹어도 평화로운 노후가 된단다.
전체 4 연에 각 연마다 핵심적인 억새의 특징이 담겨 있다. 느긋함, 곧음, 깨끗함 그리고 여유가 그것이다. 산길 들길을 걷다가 만난 억새밭 - 나는 그저 바람에 날리는 억새꽃의 아름다움만 보고는 장관이라고 감탄만 했는데, 시인은 거기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덕목을 읽고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눈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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