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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의 <춘방다방>

복사골이선생 2018. 10. 9.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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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방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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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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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 별방리엔 옛날 다방이 있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걸린 춘방다방 낡은 간판

춘방이란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담

향기 없이 봄꽃 지듯 깊게 주름 팬 얼굴에서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

단강에 뿌옇게 물안개 핀 날 강을 건너지 못한

떠돌이 장돌뱅이들이나 길모퉁이 복덕방 김씨

지팡이 짚고 허리 꼬부라진 동네 노인들만

계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 한 잔 시켜놓고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앉아 있다.

한참 신나게 떠들다가 오가는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스르르 꺼져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린다.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 탁자 사이로

추억의 '빨간 구두 아가씨'가 아직도 흐르는 곳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지켜본다.

장부 없이 외상으로 긋고 가는 커피 값

시간도 외상으로 달아놓고 허드레 것처럼 쓴다.

판자문에 매달린 딸랑종이 결재하듯 딸랑거린다.

이 바닥에선 유일하게 한 자락하는 춘방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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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쓰는 언어에는 역사성이 있다.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변하는 성질을 말한다. 이를 변하는 성질 - 가역성(可易性)이라고도 하는데, 있던 말이 사라지고 없던 말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을 가리킨다. 육교는 근대 이전에 없던 말이고 휴대전화도 30년 전에는 없던 말이다. 복덕방은 부동산중개소로 바뀌었고 예식장은 웨딩홀로 바뀌었다. 다방도 마찬가지이다. 커피숍이 등장하며 다방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방이란 말도 사라질 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방(茶房)은 만남의 장소였다. 단순한 만남만이 아니라 역 앞이나 버스정류장처럼 오가는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다방은 휴게실 역할까지 했다. 마담이 있고, 커피를 가져다주는 레지가 옆 자리에 앉아 시중도 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커피전문점이 생겨나며 이름이 다방이 아니라 커피숍으로 바뀌며 다방들이 설자리를 잃었다. 급속하게 사라진 다방은 이제 옛 시절의 유물처럼 귀한 장소가 되었다.

노향림의 시 <춘방다방>은 충북 단양군 별방리에 실재하는 다방을 그리고 있다. 춘방(春榜)이란 본디 입춘에 벽이나 문짝, 문지방 따위에 써붙이는 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바닥에선 유일하게 한 자락하는 춘방다방의 춘방은 ‘70을 바라본다는 늙은 누이 같은 마담을 가리킨다. 이 시가 2009년 작이니 지금도 있다면 70을 훌쩍 넘어 80을 바라볼 것이다. 그녀의 깊게 주름 팬 얼굴에서 / 그래도 진홍 립스틱이 돋보인다고 한다. 마담다운 행색일 것이다.


함석지붕보다 높이’ ‘춘방다방이란 낡은 간판이 달려 있고 네 평의 홀엔 다탁도 네 개가 있으며, 입구에는 행운목과 대만 벤자민이 큰 키로 서있다. 이 다방을 찾는 사람들은 강을 건너지 못한 / 떠돌이 장돌뱅이들’, ‘복덕방 김씨’, ‘동네 노인들……이다. 그들은 계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 한 잔 시켜놓고 / 종일 하릴없이 오종종 모여앉아 있기 일쑤이다. 그러니 다방은 더 이상 만남의 장소 혹은 약속의 장소가 아니라 동네 노인네들이나 지나가던 사람이 들어와 시간 때우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다방에 왔던 사람들의 사소한 잡담들이 열정과 불꽃도 없이 스르르 꺼져 / 구석의 연탄재처럼 식어서 서걱거리고, 손님들은 종종 장부 없이 외상으로 긋고간다. 어쩌면 시간도 외상으로 달아놓고 허드레 것처럼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그냥 단양에 있는 어느 다방을 묘사한 글이다. 그런데 판자문에 매달린 딸랑종이 결재하듯 딸랑거린다.’는 구절이 사소한 다방 풍경 묘사를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초인종이 없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그래도 영업을 하는 곳이니 손님이 들고 날 때 알아채야만 한다. 그러니 출입문에 딸랑종을 달아놓았을 것이다. 장부도 없이 외상을 긋고 가는 손님 - 동네 노인들, 그러나 그가 출입문을 나서면 딸랑종이 결재했다는 듯이 울리는 것이리라. ‘춘방이라는 어쩌면 촌스러운 이름의 다방. 흔히 말하는 인테리어 역시 촌스럽다. 마담이라고는 립스틱을 짙게 발랐다지만 할머니이다. 그런 다방 안에서 시간은 참 느리게 갈 것 같지 않은가.

언제 단양에 가면 춘방다방에 앉아 계란 노른자 띄운 모닝커피 한 잔 시켜놓고 / 종일 하릴없이시간을 낚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