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선우의 <얼레지>

복사골이선생 2018. 10. 10. 09:1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37)







얼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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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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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 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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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는 외떡잎식물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전역의 높은 지대의 비옥한 땅 혹은 산골짜기에서 자란다. 산우두 혹은 가재무릇이라고도 부르는데, 잎은 달걀 모양 또는 타원형으로 녹색 바탕에 자주색 무늬가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잎은 긴 타원형이다. 4~5월에 아래를 향해 자주색 혹은 홍자색 꽃이 피는데 한낮에 25이상이 되면 꽃잎이 완전히 뒤로 젖혀진다. 78월에 열매를 맺으며 잎을 나물로도 먹고 비늘줄기는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꽃말은 질투혹은 바람난 여인이라 하는데 자태가 아름다워 산 속의 요정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 <얼레지>에서는 자위하는 여인을 이 꽃으로 환치시킨다. 시의 첫머리부터 19금을 연상시킨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다는데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고 물었단다. 시 속 화자는 망설임도 없이 가끔 한다고 대답했고, 이어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는 물음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단다. 시의 앞부분에 제시된 화자와 옛 애인의 대화가 지극히 도발적이다.

시인이 여성이니 시 속 화자인 를 여성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러니 여성의 자위행위를 아무리 옛 애인이라 해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독자들을 당황시킨다. 오히려 화자는 독자들 이해할 수 있게 설명까지 덧붙인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 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라 애인에게 되물은 것이요, 그는 이해하지 못했단다. 꽃이 피는 것은 꼭 벌 나비, 즉 상대를 생각해야만 피는 것이 아니듯이 여성의 자위도 누군가를 상상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설명이다.

여기서 화자는 얼레지를 생각한다. 바로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 얼레지꽃이다. 화자는 그 얼레지꽃에 감정을 이입한다. 4~5월의 봄,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은 겨우내 움추렸던 생물들을 깨어나게 한다. 게다가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지럽힌다. 해토머리 - 바로 봄이 되어 얼었던 땅이 녹아서 풀리기 시작할 때가 아닌가. 그 때에는 겨우내 감추었던 오랜 그리움이 일깨워지고 이런 그리움은 화자의 젖망울 돋아나게 했단다.


화자는 계속 애인에게 설명을 한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란 말은 어쩌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묻는다.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답은 뻔하다. 전혀 아니라는 것. 결코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아가 화자는 ,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라며 친구에게 얼레지꽃을 보라고 한다.


실은 한낮 햇빛을 받으면 잎이 땅에 붙듯이 가라앉는 얼레지의 생태이다. 이를 화자는 얼레지가 상대가 없어도 혼자 자위를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구체적으로 다시 설명한다.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즉 서로 사랑을 나눌 상대가 없어도 얼레지는 혼자서 참숯처럼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땅을 향해 고개 숙였던 얼레지꽃이 해가 뜨면 꽃잎을 벌리고 햇빛이 더 뜨거워지면 이내 꽃잎들이 뒤로 말려 마치 댕기머리처럼 변하는 것, 동시에 잎들은 땅에 달라붙듯 내려앉는 것 - 얼레지의 이런 생태를 시인은 자위하는 여성, 그것도 상대를 상상하지도 않고 홀로 자위하는 여성으로 그려낸 것이다.

시는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 가끔 한다 -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문답과 함께 상대를 상상하지 않아도 혼자 자위할 수 있는 여성을 남해 금산에서 보았다는 얼레지꽃으로 환치시켜 얼레지의 특성과 그 아름다움을 무슨 성희를 그리듯 표현해 놓고 있다. 그런데 에로틱하다거나 난잡하지 않다. 지극히 자연스런 여성의 생리현상으로 읽히며 오히려 여자의 자위행위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 그럴까. 얼레지꽃으로 환치시켜 시로 승화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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