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황구하의 <너도바람꽃>

복사골이선생 2018. 10. 23. 23:5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42)








너도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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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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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잠복해 있다가 불쑥

꽃대궁 밀어 올리는 건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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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히 점령한 추운 기억들

그만 버리고 싶은 것

이렇게 먼 길 걸어오기까지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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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욱신거리는 몸

결국은 스스로 제 살 찢고

신음소리 내는 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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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생애를 다 바쳐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

얼마나 처절했기에

저리 환하게 맺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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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자주 꺾이던

바람은 연둣빛이었으리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붉은 종양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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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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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아도니스가 죽을 때 흘린 피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이 아네모네로 바뀌었으며, 판본에 따라 복수초로 바뀌거나 아프로디테의 눈물에서 장미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데 아네모네의 다른 이름이 바람꽃이다. 그 바람꽃이 우리나라에서는 변산바람꽃, 만주바람꽃,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남방바람꽃, 나도바람꽃, 너도바람꽃…… 등 서로 다른 18 종류가 서식하고 있단다.

바람을 좋아하는 높은 지대에서 자라기 때문에 바람꽃이란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 중에서 너도바람꽃은 우리나라 북부와 지리산, 덕유산 등 높은 산지의 반그늘에서 자라며 아주 이른 봄에 핀다. 얼음장 같은 땅을 뚫고 싹이 올라온다고들 하지만 실은 먼저 줄기가 올라온 뒤 나중에 눈이 내려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 한다. 흔히 복수초가 얼음을 뚫고 올라와 피는 최초의 봄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도 일찍 피는 꽃이 바로 너도바람꽃이다.


황구하의 시 <너도바람꽃>은 이 꽃의 개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실제 너도바람꽃겨우내 잠복해 있다가 불쑥 / 꽃대궁 밀어 올리는것처럼 보이는데, 시 속 화자는 이를 땅속 어둠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즉 어둠이 지겨워 밝은 땅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오히려 은밀히 점령한 추운 기억들을 이제 그만 버리고 싶기 때문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먼 길 걸어오기까지 /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하고 자꾸만 욱신거리는 몸 / 결국은 스스로 제 살 찢고 / 신음소리 내는 것이란다.

스스로 제 살을 찢고 신음소리를 낸다? 꽃이란 생명이 탄생하는 모습 - 개화(開花)치고는 참으로 처절하다. 게다가 전 생애를 다 바쳐 /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이 그만큼 처절했고 그렇기에 흰색으로 저리 환하게 맺혔단것이다. 온 생을 다 바쳐 꽃송이 하나 밀어 올리는 것이 얼마나 처절했기에 꽃 색깔이 흰색이었을까. 시인은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화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세상살이가 고단했으니 자주 꺾였을 테지만 그렇게 꺾은 바람은 연둣빛이었단다. 게다가 무너지는 담장에 기댄 / 붉은 종양덩어리라고? 이게 뭔 소리인가. 어느 평자는 바람꽃을 발암(發癌)의 변형으로 읽어 암 덩어리로 해석했는데, 꼭 그렇게만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너도바람꽃이 꽃술에 달린 꽃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활짝 피기 전의 꽃과 대궁이 자줏빛이니 이를 붉은 종양덩어리로, 개화 이후 잎의 색이 초록이니 이를 연두빛 바람으로 환치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정작 문제는 마지막 행이다. ‘너 사는 날까지만 살으리란다. 누가? ‘너도바람꽃이 사는 날까지만 살겠다고 말한 화자는 누구일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 속 화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누구일까. 나도바람꽃이 아닐까.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질투한 군신 아레스가 멧돼지로 변하여 아도니스를 죽였고 피를 흘리며 죽어간 그를 아프로디테가 봤다. 결국 너 사는 날까지만 살겠다는 이는 나도바람꽃혹은 아프로디테나 아도니스가 아닐까. 물론 시인의 모습이다.


시 속에 화자의 목소리가 몇 차례 바뀌고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이 작용하여 이루어낸 너도바람꽃의 개화 - 실제 너도바람꽃을 본 사람은 시를 읽으며 꽃을 연상할 수 있다. ‘전 생애를 다 바쳐 / 꽃숭어리 하나 펼쳐 보이는 길을 연 너도바람꽃먼 길 걸어오기까지 / 부은 발 따뜻이 씻어주지 못한 아프로디테 아니 나도바람꽃의 회한이 가득 담겨 있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너도바람꽃으로부터 나온다.

땅속 어둠’, ‘추운 기억들’, ‘제 살 찢고 / 신음소리 내는 것’, ‘무너지는 담장’, ‘붉은 종양덩어리……로 이어져 마지막에 내뱉는 회한 - ‘너 사는 날까지만 살겠다는 말. 나는 너도바람꽃을 보며 작고 앙증맞은 모습에 여리디 여린 꽃이란 생각만 했는데 시인은 어찌 꽃을 보며 그런 상상을 했을꼬. 시인의 상상력 - 그 끝은 어디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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