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문정희의 <동백꽃>

복사골이선생 2018. 10. 22. 14:2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40)







동백꽃

) --> 

문정희

) -->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 -->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 -->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 -->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 -->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 --> 

전존재로 내지르는

피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 --> 

) --> 

동백(冬柏)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동백나무에 피는 꽃으로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계절에 홀로 핀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섬에 많은데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대청도까지 분포하며, 육지에서는 주로 충청 이남에서 자라지만 화분에 담아 서울에서도 키우고 있다. 꽃은 주로 붉은 색인데 거문도 등 남쪽의 섬에서는 흰 동백도 있다. 겨울에 꽃이 핀다 하여 동백(冬柏)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꽃들은 질 때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데에 반해 동백꽃은 꽃봉오리가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노인들의 방에는 두지 말라고 한다. 어느 날 툭 하고 떨어지는 꽃봉오리를 보면 갑작스런 죽음을 연상하기 때문이란다. 문정희의 시 <동백꽃>도 동백꽃의 그런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인은 동백꽃을 가혹한 확신주의자라 하면서 두렵다고까지 말한다. 왜 그럴까. 바로 꽃이 지면서 봉오리 채 떨어지는 모습 때문이다. 시인은 이를 가장 눈부신 순간에 / 스스로 목을 꺾는것으로 파악한다. 실제 지는 동백꽃을 보면 잎이 시들었다거나 변색이 되지 않은 상태 - 어쩌면 가장 눈부신 순간즉 아직 싱싱한 상태임에도 떨어지는데 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나아가 시인은 동백꽃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함께 피운 것으로 파악한다. 즉 동백꽃 그 아름다움 속에는 순간의 소멸까지 담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동백꽃처럼 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능소화정도이다. 여기서 시인은 떨어지는 동백꽃을 붉은 감탄사로 인식한다. 그것도 허공에 한 획을 긋는 / 단호한 참수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고까지 한다.

마지막 연에서 동백꽃에 대한 시인의 감성은 정점에 달한다. 동백꽃의 낙화를 전존재로 내지르는 / 피묻은 외마디의 시로 인식한 시인은 자신이 시인임에도 시를 쓰지 못하고 오히려 점자를 더듬듯이 / 절망처럼 /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는다고 말한다. 어느 위대한 시 한 편보다 동백꽃의 낙화가 가장 처절한 외마디 시란 인식 때문이다.


결국 시인이 파악한 동백꽃은 가혹한 확신주의자이며 동백꽃의 낙화는 목을 꺾는행위이자 분명한 순간의 소멸이며 이는 나아가 단호한 참수가 되어 피묻은 외마디의 시로 승화된다. 붉은 빛의 동백꽃, 그 아름다움 속에는 바로 이러한 절명(絶命)의 미학까지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분명 시인임에도 동백꽃 앞에서는 시를 쓰지 못하고 마치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더듬듯이’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 속에 표현된 하나하나의 어휘들이 동백꽃의 낙화와 연결되어 분명한 소멸을 일러준다. 그런 표현들이 첫 행에서 제시한 완벽주의자로서의 동백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어느 날 봉오리 채로 툭 하고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며 섬뜩한 느낌만 있었는데 시인은 이를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 허공에 한 획을 긋는행위로 보고 있다. 시인의 통찰력이다.

그런데 뭐라? 동백꽃 외마디의 시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시를 쓰지 못하고 점자를 더듬듯 난해한 생의 음표만 더듬었다고? 그렇게 더듬은 것이 바로 이 시가 아닌가. 나 같은 범인이야 그렇게 더듬었다는 이 시에 감탄한다.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구하의 <너도바람꽃>  (0) 2018.10.23
이정록의 <대추나무>  (0) 2018.10.23
신구자의 <이팝꽃>  (0) 2018.10.21
이진흥의 <진달래꽃>  (0) 2018.10.17
김선우의 <얼레지>  (0) 2018.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