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송찬호의 <모란이 피네>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0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64)





모란이 피네

 

송찬호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마지막 종소리를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

 

그게 장엄한 사원의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태워 오지 그러느냐

,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

이리 투정하신다면 할 말은 없지만

 

긴 긴 오뉴월 한낮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

당신께 보여주려고,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펼쳐놓은 모란 보자기

 

 

많이들 모란과 작약을 헷갈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꽃만 놓고 보면 쉽게 구분이 가지 않는다. 잎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모란은 나무이고 작약은 풀이다. 그래서 모란을 나무에 핀 작약이라 하여 목작약(木芍藥)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모란(목단, 牧丹)의 아름다움을 장미와 견주는데 호화현란(豪華絢爛)한 아름다움과 기품에서는 서로 비견되지만 풍려(豊麗)함으로는 모란이 단연 돋보인단다. 즉 장미에 비해 그 꽃모양이 장려(壯麗)하고 소담스러우면서 여유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고들 말한다.

송찬호의 시 <모란이 피네>를 보면 모란의 생김새를 시인 특유의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신화를 이야기하듯 시공을 초월한 상황에서 모란의 아름다움을 잘 그려낸다. 시 속 화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외로운 홀몸 그 종지기가 죽고 / 종탑만 남아 있는 골짜기를 지나 / 마지막 종소리를 / 이렇게 보자기에 싸 왔어요라 한다. 어느 장엄한 사원의 종을 치던 종지기가 죽고 마지막 종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를 보자기에 싸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엄한 종소리라면 의젓하게 가마에 / 태워 오지 그러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을 것이다. 종소리가 아니라 , 어느 잔혹한 전쟁처럼 / 코만 베어 온 것 아니냐 / 머리만 떼어 온 것 아니냐고 다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긴 긴 오뉴월 한낮 / 마지막 벙그는 종소리를가져왔다는 것인데, 그것도 꽃모서리까지 환하게 / 펼쳐놓은 모란 보자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 ‘당신께 보여주려고.’


그렇다면 여기서 당신은 참으로 귀한 대상이다. 당신에게 보여주려고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어쩌면 요즘 많이들 좋아하는 환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본래의 모습을 전혀 다치지 않게 완벽한 모습을 가져오려 모란 보자기에 싸왔다고 한다. 오뉴월에 피는 모란이니 긴 긴 오뉴월 한낮 / 마지막으로 피어나는 꽃 - 바로 그 마지막 종소리를 보자기에 싸왔다는 것 - 맞다, 바로 모란의 모습이다.

꽃이 활짝 핀 모란 속을 들여다보면 시 속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빨간 꽃잎은 비단 보자기이고 노란 암술과 수술은 그 생김새가 종소리를 연상시킨다. 암술과 수술의 위치와 모양 그리고 생김새까지 마치 종소리가 울려 장엄하게 퍼져나가는 모양이요 주위의 넓은 꽃잎은 그 소리를 감싸고 있는 보자기임에 틀림이 없다.


모란꽃을 보며 그 생김새에서 어찌 종소리를 연상했을까. 읽고 보니 그렇지 않은가. 거기에 시인은 어느 신화의 한 장면 같은 환타지까지 그려낸다. 모란을 그렇게 여러 차례 봤으면서도 나는 왜 이런 상상을 하지 못했을까. 하긴 그러니 시인이 아니겠는가. 시를 다 읽고나면 제목 모란이 피네가 마치 종소리가 울려 퍼지네같은 느낌이 든다. 그 종소리를 듣는 당신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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