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춘수의 <달맞이꽃>

복사골이선생 2018. 10. 25. 13:58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45)







달맞이꽃

 

김춘수

 

밤하늘을 기차가 달린다.

집이 덜커덩 덜커덩거린다. 밤에

불 켠 가로등이 쓸쓸하다

 

時代

땅은 끈끈하고 누군가 징 박힌

구둣발 소리 지나간다.

그 자리

그리스 신화처럼 꽃 한 송이

희부옇게 피어나는가 하더니

얼른 얼굴을 가린다.

 

 

한 때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가 문단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아무런 의미를 담지 않은 시 -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읽는 사람의 숫자만큼 많은, 다양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시가 된다. 영상이나 사진은 하나의 이미지만을 전달한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꼭 같을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느낌으로 고정된다. 그러나 언어로 전달되는 시는 그렇지 않다. 독자의 수만큼 그 느낌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시 <달맞이꽃>을 읽다가 문득 그의 무의미의 시를 생각하고, 곧이어 참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목이 달맞이꽃이다. 독자는 제목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그 느낌은 제목으로부터 시작한다.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알려진 달맞이꽃은 바늘꽃과에 속하는 2년생 초본식물로 밤에 달을 맞이하며 꽃이 피는 습성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낮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달이 뜨는 밤이 되어야 꽃잎을 벌리는 달맞이꽃’ - 그렇다면 시상은 밤에 시작한다.

시인은 달맞이꽃을 보며 그리스 신화처럼 꽃 한 송이 / 희부옇게 피어나는가 하더니 / 얼른 얼굴을 가린다고 했다. 분명 달맞이꽃을 보았지만 노란 꽃잎이 달빛을 받아 희부옇게보였을 것이다. 피는 것 같기도 하고 지는 것 같기도 했을 꽃에서 시인은 상상력의 나래를 편다. 거기에는 밤하늘을 기차가 달리고 기차의 울림 때문에 집이 덜커덩 덜커덩거린다.’ 어디 그뿐인가 밤에 / 불 켠 가로등이 쓸쓸하게 보인다.


바로 밤이라는 시간이 준 효과일 것이다. - ‘時代이다. 그런 시절에 땅은 끈끈하다니. 어떤 시절이기에 땅이 끈끈할까. 맞다. 3공화국과 유신 - 언론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시대. 그런데 누군가 징 박힌 / 구둣발 소리는 어쩌면 도둑일 수도 있겠지만, 도망 다니는 민주화 투쟁을 하는 운동권 인사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예쁜 구두를 신은 밤길의 여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끈끈한 땅을 딛은 징 박은 구두는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한다.


결국 달맞이꽃에서 시작된 상상의 나래가 - 하늘을 달리는 기차 - 덜커덩거리는 집 - 쓸쓸한 가로등 - 끈끈한 땅 - 징 박힌 구둣발 소리로 이어지며 펼쳐진다. 맞다. 시대의 아픔이 달맞이꽃으로부터 시작된 상상의 날개 속에 숨어 있다. 밝은 낮에는 피지 못하고 달이 뜨는 밤에만 살짝 피었다가 입을 닫아버리는 달맞이꽃을 보며 시인은 時代그 자리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리라.

전체 102연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사적으로는 7~10 다음에 1~6이 이어진다. 다만 시인은 의도적으로 달맞이꽃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시적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마지막에 놓았을 뿐이다. 여기에 시행 배열의 기법도 보인다. 밤하늘을 기차가 달리니 (밤에) 집이 덜커덩거릴 것이고, (밤에) 불 켠 가로등이 쓸쓸하다고 한다. 바로 2, 3 행에 공히 연결될 밤에2행 끝머리에 붙여 놓았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기차(유신정권)가 정해진 선로 위로 달린다. 기차가 달리는 울림에 주변 집들(국민들)은 덜커덩거릴 것이지만 기차가 지난 다음 골목(사회)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 가로등만 쓸쓸하다. 그런 시대, 땅이 끈끈하던 그 자리에 징을 박은 구둣발 소리(쫓기는 민주화 인사들)가 잠시 들린다. 그 소리에 달맞이꽃(작은 희망)이 피어나고 소리가 사라지니 꽃도 입을 다문다. 저 암울하던 시대의 한 장면이다.


우리는 흔히 무의미의 시라 부르지만, 사실 의미가 없는 시는 없다. 시인은 무언가 의미를 담아 한 편의 시를 쓸 것이요, 독자는 그 시를 읽고 나름대로의 상상력으로 의미를 느낀다. 물론 같은 시를 읽었다고 해도 그 의미가 독자들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수많은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 - 그래서 아마 무의미라 하지 않았겠는가. 그냥 나 혼자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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