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박영근의 <호박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0:5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5)





 


호박꽃

박영근


밤새 몰래 밭둑을 더듬고 간 여우비에

과부 한숨이 벙글었네

비바람에 꽃이 진들 어떠리

애호박 따는 손이 첫서방 보듯 떨리었구나

 

 

흔히 잘 생기지 못한 얼굴을 호박꽃이라 말하는데, 꽃은 인간들 눈에 아름다우라고 피는 것이 아니다. 꽃은 식물에게는 생식기이다. 그러니 식물 입장에서는 수정이 잘되어 열매만 잘 맺으면 된다. 그런 면에서 호박꽃은 큼직하니 입을 크게 벌리고 벌과 나비를 잘만 유혹하여 척척 호박을 맺으니 그만한 꽃이 없다. 촌에서 호박을 심어 키워본 사람은 안다. 아니 꼭 촌이 아니라도 도시의 텃밭에서라도 호박을 키워 본 사람은 안다. 호박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박영근의 <호박꽃>을 읽으면 바로 밭둑에 뒹구는 그 호박 넝쿨과 함께 호박잎, 호박꽃 그리고 애호박이 보인다. 흔히 여우비는 햇볕이 있는데 잠깐 내리다가 곧 그치는 비를 말한다. 그런데 밤새 여우비가 밭둑을 더듬고 갔단다. 거기에 과부 한숨이 벙글었다고? 벙글다는 말은 (꽃봉오리나 열매가) 맺힘을 풀고 툭 터지며 활짝 열린다는 뜻이다. 과부 한숨을 꽃봉오리나 열매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벙근 것은 여우비 때문이란다. ‘과부 한숨이라……

그렇다. 과부 심정 누가 알아주겠는가. 비바람이 불어 꽃이 진들 어쩌겠는가. 호박넝쿨에서 애호박을 따는 과부의 손길 - 바로 첫서방 보듯떨리는 것이다. 밭둑 더듬다 - 여우비 과부 한숨 벙글다 - 애호박 첫서방 - 떨림으로 이미지가 연결되어 아주 소박한 그러나 그야말로 아름답게 서글픈 한 폭의 그림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알맞게 농익은 그림이다.

이런 시를 만드는 시인은 마흔일곱 한창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간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첫 노동자 시인이라 그랬던가. 아니다, ‘노동자란 관형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 참 소박한 시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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