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장서언의 <박>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0:59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6)







장서언


바람불어 거스러진

샛대 지붕은

고요한 달밤에

박 하나 낳았다.

 

 

장서언의 시 <>을 읽으면 그냥 눈 앞에 바람불어 흐트러진 샛대 지붕과 함께 그 위에 덩그라니 얹혀 있는 커다란 박이 떠오른다. 아주 멋진 그림이다.


샛대는 억새를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 거스러진이란 잔털 같은 것이 거칠게 일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니 초가가 아니라 억새를 엮어 얹은 지붕에 바람이 불러 억새 잎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지붕 위로 밤에 보름달이 떴다. 조용한 밤, 억새 지붕은 그 달을 그대로 받아 지붕 위에 달을 하나 낳았단다.


사실 이런 설명도 필요 없다. 읽으면 그림이 보이지 않는가. 바로 우리 현대시의 이미지즘 한복판에 활동했던 장서언의 시이다.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강조했듯이 이 시는 그야말로 언어로 그려놓은 참 소박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런데 지붕이 박을 낳았다고? 시인의 눈에는 고요한 달밤에 달의 정기를 받아 지붕이 커다란 박을 낳은 것으로 봤을 것이다. 시인 고은은 이를 가리켜 () 뒤에 정()이 어른거린다.’고 평을 했다. 참 예리하다. 장서언의 그림도 좋고, 고은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평도 어울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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