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허영자의 <감>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0:5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4)





 


허영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소설이나 수필과 달리, 시는 젊은이의 갈래라 했다.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젊은 영혼의 노래라는 말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묘하게 나이 든 시인의 시가 가슴에 잘 꽂힌다. 내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인의 작품이 그만큼 원숙해서일까.


허영자의 시 <>은 여섯 행으로 인생을 다 말하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익어가는 단감을 통해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을 읽어낼까. 그래서 시인이 아니겠는가.

3행은 가을 햇살 속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나이 먹고 철이 든다는 것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 아닌가. 나이를 먹는 것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요, 철이 드는 것은 당연히 인생의 어떤 결실이리라. 나머지 3행은 앞 3행을 구체화한다. 젊은 날, 방황하고 갈등하고, 어쩌면 반항과 거부하는 행동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떫고 비리던젊은 날도 세월이 가면 익게 된다. 바로 저 붉은 단감처럼 말이다. 3행과 6행 끝머리에 ‘~() 수밖에는은 언뜻 보면 체념으로 읽힌다. 그러나 오히려 그만큼 세월에 순응하는 태도일 것이다.

문득, 진갑을 넘겼음에도 나는 과연 단감으로, 제대로 익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아직 철이 더 들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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