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조용미의 <가시연>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0:48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




가시연


-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 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이 시를 설명하는 것은 사족이다. 그냥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전에 보았던 가시연꽃을 기억해낼 것이다. 어찌 꽃이 피어나는 그리고 피어 있는 모습을 이렇게 처절하게 표현해 낼까. 시를 읽으며 나는 , 맞아, 그래, 가시연꽃을 보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지?’하며 멍해졌을 뿐이다. 그러니 가시연꽃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저 감탄이 앞설 뿐이다.


가시연꽃은 수련과의 연꽃인데 가시가 많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특히 잎과 열매 그리고 꽃대에는 가시투성이이다. 시인도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라고 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꽃이 피는 과정인데, 대개 가시가 있는 긴 꽃대가 연잎을 뚫고 나온 다음에 꽃대 끝의 봉오리가 벌어지며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 살을 뚫고 물 속에서 솟아오른다고 하고 있다.


식물인 꽃을 표현하며 시인은 동물성으로 형상화한다. 꽃이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맹수가 주변을 호령하며 등장하는 것과 같은 광경이다. 그 기세에 눌려 호수 주변에 둘러쌓은 방죽이 허물어질 정도이다. 그 허물어지는 소리를 혼자 들으며 기세등등하게 혓바닥을 보이는 꽃. 그렇기에 시인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하다며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고 하지 않는가.


흔히 개화(開花)라고 하면 비유적으로 생명의 탄생을 생각한다. 그런데 가시연꽃의 개화는 아름다운 생명의 탄생이라기보다는 슬프다. 아니 처절하다. 왜 그럴까. 시인이 그렇게 묘사한 것이 아니다. 직접 가시연꽃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시인은 시인이 본 대로 아주 정확하게 그리고 흑자줏빛 멋진 그림으로 형상화해 놓았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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