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승희의 <패랭이꽃>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0:4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





패랭이꽃

- 이승희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 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보이잖아,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고, 6,70년대 저녁상을 받은 내 부모형제들 모습이 보인다. 맞다, 퇴근하신 아버지는 ()자 새겨진 밥그릇과 국그릇이 놓인 독상을 받으셨고, 형제자매들은 어머니와 옹기종기 커다란 찌개 양푼에 숟가락 젓가락 담궜다. 그때 천장에는 분명 알전구였을 것이다.


평량자, 평량립, 폐양립, 차양자 등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패랭이는, 양반네들의 갓과 같은, 서민들의 쓰개 - 모자였다. 그 모양을 닮았다하여 붙은 이름 패랭이꽃’. 우리네 서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다고 할까, 고귀한 신분,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그저 장삼이사, 필부필부와 같은 꽃. 그래서 더 정겨운지 모른다.


두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첫 문장에서 낮을 둘째 문장에서 저녁을 그리고 있다. 모두가 우리네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다. 호미, 삽자루, 새끼, 자식들, , , 하늘……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풍경이 참 행복하다. 둘째 단락도 마찬가지이다. ‘늠름하신아버지와 물동이를 이고 가는어머니…… 방마다 알전구가 켜진 모습을 읽으면서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된다.

어쩌면 패랭이꽃을 보고, 꽃잎들을 보며 이렇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생각했을까. 그것도 비록 많은 쉼표들로 이어졌다지만 단 두 개의 문장만으로 만들어내다니. 제목을 모르면 그냥 일반 서민들의 건강한, 그리고 행복한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맞아, 그래, 이게 그 꽃이야!’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시인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라 하는데 나는 시를 읽고서야 그것이 보인다. 시심이 얕은 나로서는 시인의 놀라운 통찰력과 상상력이 시샘이 날 정도이다.

어떤 이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늠름하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복()된 삶을, 더할 수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평했는데, 그런 문장이 아니라도 이 시를 읽으면 그냥 패랭이꽃과 함께 내 가족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진다.

사족 - 여자 이름 같지만 <패랭이꽃>의 시인은 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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