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서정춘의 <수수꽃다리>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1:05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8)





수수꽃다리


서정춘


자기 몸의 암향을

아꼈다가 조금씩

꽃 벌에 들켜버린

사춘기들아

저년들 생살에

벌을 쏘이면

시집 빨리 간댔더니

왁자지껄 사라지는

여동생들아

 

 

한반도 북쪽에 자생하는 우리 꽃 수수꽃다리는 흔히 라일락이라 부르는 서양수수꽃다리와 매우 유사하다. 물푸레나무과의 수수꽃다리속(Syringa)’은 그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이던 1947, 미군정청 소속 엘윈 M. 미더(Elwin M. Meader)라는 사람이 북한산과 도봉산 등지에 자라고 있던 수수꽃다리속의 또 다른 종인 털개회나무(또는 정향나무)’의 종자를 채취,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했는데 당시 자료정리를 도왔던 한국인 미스 김의 이름을 따서 미스김 라일락(Miss Kim Lilac, Syringa patula "Miss Kim")’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이 나무가 1970년대 역수입되어 서양수수꽃다리(라일락)’와 더불어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7, 80년대의 수수꽃다리라일락향기는 대학 캠퍼스를 떠올렸다. 그만큼 낭만이 깃든 꽃향기이다. 시를 읽으면 그 향기에 끌려 꽃나무 주위에 모여든 소녀들이 보인다. 꽃송이에는 꿀벌들이 날아들고…… 향기에 취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소녀들이 벌이 왕~~하고 날으니 깜짝 놀라 흩어진다. 벌에 쏘이면 시집을 일찍 간다고…… 누가 그런 말을 만들어냈을까. 참 재미있다. 그런데 꽃 벌에 들켜버린 / 사춘기들이지만, 꽃 벌에 쫓길 때에는 여동생들이 된다. 사춘기들보다는 여동생들이 감정적 거리가 가깝지 않은가. 화자의 감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서정춘의 시를 읽으면 한 폭의 그림과 함께 종종 한 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수수꽃다리>도 마찬가지이다. 향기가 좋기로 따지자면 순위에 빠지지 않는 우리 꽃 수수꽃다리와 함께 벌과 소녀들을 등장시켜 이렇게 멋진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5월의 수수꽃다리주변 풍경이 정말 왁자지껄낭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이 시의 매력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면 수수꽃다리서양수수꽃다리(라일락)’ 혹은 미스김 라일락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알아두자. 우리 이름은 수수꽃다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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