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사인의 <개나리>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02:1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49)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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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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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보았던 듯도 해라

황홀하게 자지러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때쯤 한 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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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날 몇 밤을 그대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어쩔거나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로다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을 이기고

내가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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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로 이민을 간 사람이 고향집 울타리에서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몇 가지를 꺾어 호주로 가 넓은 뜨락에 심었는데, 고향집에서 보다 더 풍성하게 자랐단다. 그런데 꺾꽂이를 통해 집 안 가득 심었는데 해가 갈수록 가지와 잎은 무성하게 자라면서도 해가 바뀌고 4월이 되어도 꽃이 피지 않더란다. 이유인 즉, 개나리는 매화나 튜울립처럼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서야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후에야 꽃을 피우는 개나리는 한국의 토종 식물이자 봄철의 대표적인 꽃나무로 노란 꽃이 아름답고 토질을 가리지 않는다. 음지와 양지,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사질양토에서 잘 자라고 추위와 건조에 잘 견디며 공해와 염기에도 강하여 한국 전역 어디에서나 적응을 잘한다고 한다.


이러한 개나리는 문학작품은 물론 노래로도 많이 불려졌다. 흔히 노란색과 꽃 모양의 귀여움이 두드러져 밝고 귀여움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김사인의 시 <개나리>는 여타 개나리를 소재로 한 시와는 그 느낌이 다르다. 물론 진보 문학 운동 전위에 섰던 김사인 시인의 이력을 감안하고 읽으면 쉽게 이해될 것이지만, 그런 외적인 것을 모르더라도 시를 읽으면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를 알 수 있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로 시작되는 동요가 시 속에 깔려 있다.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가 바로 그 부분이다. 4월이 되면 피는 개나리, 그래서 개나리를 보면 시 속 화자는 4월을 기억하고, 과거 4월이면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4·19로 대표되는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이다.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최루탄을 맞으며 외치는 모습은 바로 병아리떼가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린 것이리라.


그 시절, ‘한 번은 보았을 것이다. 아니 만났을 것이다. 개나리를 통해 4월을 기억하고 이어 황홀하게 자지러드는 /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를 떠올리며 함께 스크럼을 짜고 외쳤던 동지들을 떠올린다. 경찰에 쫓겨 소위 닭장차에 실려 여기저기 유치장으로 끌려가고 서로가 서로를 몇 날 몇 밤을 그대 /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 어쩔거나 /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았다. 지금 개나리를 보며 그 시절을 떠올려보니 그때쯤 한 번은 / 우리 만났던 듯도할 것이다.

그러니 세월이 흐른 지금 ‘4월 하늘은 화자에게 현기증 나는 비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지들을 보고픈 마음에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을 이기고 / 내가 가야겠다는 각오가 나온다. 그러니 이 시는 개나리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개나리를 바라보며 느끼는 시인의 과거 회상과 현재의 각오이다. 따라서 시 속 개나리는 시적 대상이 아니라 연상작용의 매개체일 뿐이다.


그럼에도 시를 읽다보면 개나리가 피어 있는 광경이 떠오르며 저 암울했던 유신시절 그리고 80년대를 떠올리게 된다. 시인의 아픔에 나까지 아픈 것은 왜일까. 내가 시 속에 빨려들어갔을까. 밝고 고운 개나리를 보며 나를 이렇게 아프게 하는 김 시인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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