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선우의 <매발톱>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1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67)







매발톱

 

김선우

 

야생화 전시장에서 산 거라고, 먼 곳에서

자그만 매발톱풀을 공들여 포장해 보내왔습니다

그 누구의 살점도 찢어보지 못했을

푸른 매발톱

한 석달 조촐하니 깨끗한 얼굴이더니

깃털 하나 안 남기고 날아가버렸습니다

매발톱풀을 아랫녘 밭에 묻어주러 나간 날은

이내가 피곤하게 몸 풀고 있는 저물 무렵이었는데

거름이나 되려무나

밭 안쪽에 화분 속을 엎었습니다

화분흙에 엉겨 있는 발톱의 뿌리는

보드라운 이내 속 깊은 허공 같아서

여리디여린 투명한 날개들이

그제서야 사각대며 일제히 날아올랐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 내 꿈속을 찾아왔으나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보여준 적 없는 바람을 타고

반짝이는 수천의 실잠자리떼

이내 속 깊은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이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들꽃에 관심을 두고 일부러 찾아 즐기면서 늘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하는 것이다. 개망초, 노루오줌, 며느리밥풀, 애기똥풀…… 물론 처음 발견한 사람 혹은 식물학자가 꽃의 생태 혹은 생김새에서 착안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으리라. 그러나 과연 그 이름이 해당 꽃에게 적확한 것인지, 꽃의 입장에서도 수긍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꽃이 들어온 이후 나라가 망했다 해서 붙여진 망초(亡草)’, 그 망초와 비슷하다고 붙여진 개망초’, 뿌리에서 지린내가 난다고 해서 붙은 노루오줌…… 들은 꽃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런 의문을 김선우의 시 <매발톱>은 잔잔하게 꽃의 입장을 생각하며 부르짖고 있다. 시적 대상인 매발톱은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우리나라 전역 계곡과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풀이다. 본디 들꽃이지만 요즘에는 원예용으로 개량하여 화분에 많이 키운다. 5월에서 7월 사이에 갈색, 노란색, 자주색 등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우는데 아래로 핀 꽃에서 위로 뻗은 긴 꽃뿔이 마치 매의 발톱처럼 생겼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 매발톱의 입장에서는 어떠할까. 김선우의 시는 바로 그 점을 이야기한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시인에게 야생화 전시장에서 산 거라고, 먼 곳에서 / 자그만 매발톱풀을 공들여 포장해 보내왔. ‘매발톱이란 이름과 달리 그 누구의 살점도 찢어보지 못했을푸른 꽃은(색깔로 보아 아마도 하늘매발톱이었던 모양이다.) ‘한 석달 조촐하니 깨끗한 얼굴로 꽃을 피우더니 (꽃을 매발톱이라 했으니 로 간주하고) ‘깃털 하나 안 남기고 날아가버렸단다. 즉 꽃이 지고 시들었을 것이다.

화분에서 말라죽을 것이 안타까워 시인은 매발톱풀을 아랫녘 밭에 묻어주러나간다. 마침 이내가 피곤하게 몸 풀고 있는 저물 무렵이었다는데, ‘이내가 무엇인가. 흔히 남기(嵐氣)’라고 하는, 해 질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지 않은가. 그러니 시인이 매발톱을 밭에 묻어주는 시각이 시인이나 매발톱에게는 그만큼 상서로운 때이다. 시인은 마음속으로 매발톱에게 거름이나 되려무나하는 말을 하고 밭 안쪽에 화분 속을 엎었.

겉으로는 줄기가 나고 잎이 자라 꽃을 피웠던 매발톱이지만 화분 안쪽은 어땠을까. ‘화분흙에 엉겨 있는 발톱의 뿌리는 / 보드라운 이내 속 깊은 허공 같아서 / 여리디여린 투명한 날개들이 / 그제서야 사각대며 일제히 날아올랐단다. 시인은 꽃을 로 간주한다. 그러니 발톱의 뿌리라 했고, 하얀 실오라기 같은 그 뿌리를 여리디여린 투명한매의 날개라 한 것이리라. 나아가 수천의 실잠자리떼가 되어 상서로운 이내의 기운이 깔려 있는 허공으로 날아갔단다. 시인이 보았던 꽃의 푸른색까지 깔려 있다. 그렇게 밭 안쪽 땅에 묻혔다.

여기서 시인은 생각해 본다.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 /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 이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들었다고. ‘매발톱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이름지어 부르는 온갖 자연물들 - 그들은 인간이 지어 부르는 이름에 만족할까. 진정 그 이름이 해당 자연물의 입장에서 자신을 주체적으로 나타내는 이름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시인의 생각이다.

시를 읽다 보면 한낱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이지만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이 보이고 나아가 어쩌면 온갖 자연에 내키는 대로 이름을 지어 불러대는 인간의 교만을 질타하는 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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