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정우영의 <생강나무>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1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68)







생강나무

 

정우영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을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봄의 전령사 격인 꽃으로 흔히 복수초, 매화 그리고 생강나무를 꼽는다. 이 중 많이들 생강나무를 산수유와 같은 것으로 아는데 실은 전혀 다른 나무이다. 식물학자의 말에 따르면 생강나무는 한반도 자생의 고유 식물이고 산수유는 지금이야 우리 나무가 되었지만 실은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종이란다. 게다가 산수유는 층층나무과이며, 생강나무는 녹나무과란다. 이처럼 두 나무는 계통분류가 전혀 다른데 꽃만 보고는 같은 것으로 판단한다. 하긴 꽃만으로는 나도 헷갈릴 때가 있다.

나무껍질을 벗기면 생강 냄새가 난다 하여 생강나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 나무를 흔히 생앙나무’, ‘아귀나무’, ‘동백나무혹은 산동백나무라 부른다. 학창 시절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동백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꽃이다. 소설 속에서 점순이를 안은 채 넘어져 가 느끼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가 바로 점순이의 체취이자 생강나무꽃 향기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선운사의 빨간 동백과는 나무는 물론 꽃 자체가 다르다.

우리들에게 봄의 전령사로 알려진 이 나무를 정우영의 시 <생강나무>에서는 다르게 해석한다. 미리 말하지만 봄의 전령사라든가, 생강 냄새 혹은 노란 꽃의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일상적 의미보다는 보다 철학적이다. 정 시인이 이제 곧 환갑이다. 그러나 시는 마흔여섯에 쓴 모양이다. 그러니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란 표현을 쓰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때로는 시인이 시 속에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흔여섯 해를 걸어 다녔으니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녔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걸어 다닌 자신보다 오히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 훨씬 더 많은 지구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우리들의 삶이란 생존 경쟁이 아닌가. 때로는 여행을 하며 여유를 만끽한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생존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였지 않은가.

그러나 생강나무는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고, 이어서 느긋하게 잎이 나고, 꽃이 지며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까맣게 되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겨울을 지나 다시 꽃을 피운다. 느려도 정말 느려 터진 삶이다. 그러나 그 속을 보면 생강나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인간과 동물들이 지나가고 식물들이 피었다가 졌겠는가. 그를 통해 생강나무는 한 곳에 서 있지만 자신을 지나쳐 간 인간, 동물, 식물 등을 통해 지구에 대한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둘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자라 나중에 늙어 죽는다.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듯 홀연 어느 날 내 길 끊기듯 / 땅 위를 걸어 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을 뜨고 /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분명하다. 그렇다면 누가 더 지구에 대해 많이 알고 있겠는가. 생강나무일까 시인일까. 답은 자명하다.

그래서 시인은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 생강나무임을깨닫는다. 그렇게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시인은 자신의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 생강나무 시간 속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생강나무의 삶을 알고 그것이 어떠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시인 자신도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 바로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시간이란 방식이다.

시 제목이 꼭 생강나무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나무 이름을 제목으로 해도 의미는 통한다. 그러나 중부 내륙과 서해안 지역인 충청 호남 지역에 많다는 생강나무, 전북 임실 출신인 정 시인이 어려서부터 생강나무를 많이 보고 자란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산수유나 동백 혹은 벚꽃나무보다 더 의미 있게 만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내 생각이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변하고 온갖 전자기기들은 출시되며 이미 중고품이 되어 버린다. 그만큼 기술의 발달이 놀랍도록 빠르다. 거기에 발맞춰 우리들의 삶 또한 바빠지고 있다. 이런 때, 구태여 아날로그라든가 느리게 살기를 말하지 않아도 정우영 시인이 이야기한 생강나무의 시간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면 어떨까.



마로니에 시낭송회에서 정우영 시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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