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허림의 <능소화 붉은 밤>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3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81)







능소화 붉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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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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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희네 집

구름같이 모란이 벙글고

젖무덤만한 나무수국 뭉글뭉글 멍울지고

붉은 속살 터지듯 배롱나무 꽃 핀다

서로 등이 되어 휘감은 능소화 붉다

누가 피는 꽃을 말리겠는가

유독 붉은 발자국으로 내려앉아

지극에 이르는

꽃의 금당

피는가 싶게 벌고

벌었다 싶으면 지는

, 그늘 아래 앉아

꽃으로 살다간

그 여자

마당 가득 서성이는

붉은 꽃잎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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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는 조선 중기 동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허엽의 딸로 태어나, 오빠(허봉)와 동생(허균)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기 시작해, 불과 여덟 살 때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이었다. 그러나 남존여비의 시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어른들이 정해준 집안으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무척 심했으며, 자식마저 유산으로 모두 잃었다고 한다.

게다가 오빠인 허봉이 귀양살이를 하다 죽고, 동생인 허균마저 유배를 떠나는 등 친정집도 불행이 끊이지 않았고, 난설헌은 이 모든 불행을 견디며 오직 시를 짓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는데,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지만 불행한 가정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의 시에는 집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여인들의 사정과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담겼는데, 이는 어쩌면 당시로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림의 시 <능소화 붉은 밤>에서는 바로 난설헌을 능소화에 빗대어 그리고 있다. 시의 배경은 첫행에 나온다. 바로 초희네 집이다. 초희. 바로 난설헌의 본명이다. 그곳에는 구름같은 모란, 젖무덤만한 나무수국, 붉은 속살 터지는 배롱나무 꽃이 핀다. 그리고 능소화도 있다. 시속 화자의 시선은 여러 꽃을 거쳐 능소화에 머문다. ‘서로 등이 되어 휘감은 능소화 붉다고 했다.


누가 피는 꽃을 말리겠는가절대 말리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조선 중기,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어땠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으로 환치된 여자 - 당시로서는 그냥 꽃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아무리 능소화가 유독 붉은 발자국으로 내려앉아 / 지극에 이르는 / 꽃의 금당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집 안, 담장 안에서의 일이어야 한다. 금당(金堂) - 본존불을 안치하는 절의 중심 건물이라 칭송하지만, 결국에는 집 안의 일이다.

그러니 피는가 싶게 벌고 / 벌었다 싶으면 지는신세일 뿐이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한 화자는 여기서 현재로 돌아온다. ‘, 그늘 아래 앉아 / 꽃으로 살다간 / 그 여자난설헌을 생각하고 문득 마당 가득 서성이는 / 붉은 꽃잎 본다고 했다. 능소화는 꽃이 질 때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백처럼 꽃이 통째로 떨어진다. 우리들 눈에는 아직 싱싱한 것 같은데 피는가 싶으면 떨어진다. 그렇게 떨어진 통꽃들이 마당 가득 서성이는풍경 -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일찍 지고만 난설헌의 삶이 그렇지 않았겠는가.


꽃이 통째로 떨어지는 능소화, 마당 위에 널린 떨어진 꽃들…… 구름같고 젖무덤 같고 붉은 속살 터지는, 여성성이 강조되는 모란, 나무수국, 배롱나무꽃과는 달리 붉은 발자국으로 내려앉아’ ‘피는가 싶게 벌고 / 벌었다 싶으면 지고 만 능소화 - 바로 난설헌의 삶이다.

어찌 난설헌의 삶을 이렇게 멋지게 능소화로 환치시켰을까. 능소화란 꽃의 생태를 잘 알고 있는 허림 시인의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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