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박남준의 <풍란>

복사골이선생 2018. 8. 21. 13:4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83)







풍란

 

박남준

 

풍란의 뿌리를 만진 적이 있다

바람 속에 고스란히 드리운 풍란의 그것은

육식 짐승의 뼈처럼 희고 딱딱했다

나무등걸, 아니면 어느 절벽의 바위를 건너왔을까

가끔 내 전생이 궁금하기도 했다

잔뿌리 하나 뻗지 않은 길고 굵고 둥글고 단단한

공중부양으로 온통 내민 당당함이라니

언제 두 발을 땅에 묻고 기다려보았는가

저 풍란처럼 바람결에 맡겨보았는가

풍란의 뿌리로 인해 세상은 조금 더 멀어져갔지만

풍란으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

한 평 땅이 없으면 어떠랴 길이 아닌들

나 이미 오래 흘러왔으므로

 

 

풍란(風蘭)은 난과에 속한 상록성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 남부 해안가와 제주도의 험준한 암벽에 주로 붙어서 자라는 착생란(着生蘭) 식물이다. 주변습도가 높고 햇볕이 잘 들어오거나 반그늘의 바위나 나무의 이끼가 많은 곳에서 자란다. 현재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I급으로 분류된 보호종으로 지금은 여러 종으로 개량되어 화분에 담아 관상용으로 많이 기른다.

풍란이란 이름은 바람결에 날아오는 습기를 먹고 산다하여 붙은 것인데 그 뿌리는 잔뿌리가 없이 두껍고 굵으며 속이 빈 스펀지 모양의 세포(spongy cell)가 여러 겹의 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껍질 구조는 수분을 흡수하여 저장하는 기능을 한다는데, 그 덕에 착생란이 건조한 암석이나 나무의 표면에 붙어서 살 수 있다고 한다. 습도가 높은 곳을 선호하지만 지나치게 습윤한 곳에서는 오히려 잘 자라지 못한다. 그러니 주기적으로 분무기로 물을 뿌려줘야지 무작정 물을 주면 잘 자라지 못한다.

박남준의 시 <풍란>풍란의 이러한 생태를 우리네 삶에 견주어 칭송하고 있다. ‘풍란의 뿌리를 만진 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시인이 풍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던 모양이다. 풍란의 뿌리는 육식 짐승의 뼈처럼 희고 딱딱했다고 한다. ‘잔뿌리 하나 뻗지 않은 길고 굵고 둥글고 단단한뿌리이다. 맞다. 풍란에는 실 같은 잔뿌리가 없다. 굵고 긴 뿌리가 몇 가닥 몸을 지탱하고 양분을 수집하기도 한다. 그런 모양을 보며 시인은 공중부양으로 온통 내민 당당함이라 칭송한다.


여기서 시인은 되묻는다. ‘언제 두 발을 땅에 묻고 기다려보았는가라고. 그리고 나아가 저 풍란처럼 바람결에 맡겨보았는가라고 또 묻는다. 어쩌면 자신에게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인 스스로 답을 한다. 뿌리가 공중에 떠 있으니 뿌리로 인해 세상은 조금 더 멀어져갔을 것이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을 통해 시인은 얻은 것이 있다고 한다. 바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네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공중에 떠서 바람결에 날아오는 수분으로 목을 축이는 풍란이다. 그러니 비록 우리네 삶이 한 평 땅이 없으면 어떠랴라 되뇌이는 것이다. 게다가 길이 아닌들시인 자신이 이미 오래 흘러왔으므로그깥 땅 한뙈기 없는 삶이 무에 그리 큰일이냐고 당당해지는 것이다.


잔뿌리 하나 뻗지 않은 길고 굵고 둥글고 단단한풍란의 뿌리를 통해 풍란이 공중부양으로 온통 내민 당당함을 보고는 시인은 한 평 땅이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 역시 어떠랴고 자평을 한 것이리라. 풍란에게 배우는 당당함은 비록 땅 한 평 없는 가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바람결에 맡기는 삶 - 우리네 상식을 넘어선 초연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런 인생관이 참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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