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정석봉의 <옥잠화>

복사골이선생 2018. 8. 25. 02:0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06)








옥잠화

) --> 

정석봉

) --> 

뒤뜰에 맺히는 한 송이 방망이

하얀 기억이 솟아오른다 뭉게뭉게

구름 피는 날, 두들기던 빨래

시어머니의 구박에 구겨졌던 홑청이

배냇짓으로 말끔히 펴지고

헤프게 불어오는 실바람에

풀 먹인 시집살이가 실려 온다

볼멘소리 숨겨주던 다듬이 소리는

초록 다듬잇돌 등살에서

바삭바삭 익어간다

늦더위 햇살에

까맣게 잊었던 그리움이

꽃대에서 또가닥 또가닥 쏟아진다 이제는

잔소리도 내려놓으시고

한 잎의 선산아래

긴 꽃잠을 주무시는 그믐밤

흘기던 눈빛만 처녀자리에서 반짝인다

) --> 

) --> 

옥잠화(玉簪花)’는 외떡잎식물로 백합목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인데 중국 원산이지만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꽃이다. 굵은 뿌리줄기에서 잎이 많이 나오는데 자루가 길고 달걀 모양의 원형이다. 89월에 흰색 꽃이 피는데 향기가 좋으며 6개의 꽃잎 밑부분은 서로 붙어 통 모양으로 되어 있다. 한자어 그대로 풀어서 옥비녀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석봉의 시 <옥잠화>에서는 이 꽃을 옥비녀가 아니라 다듬이 방망이, 즉 홍두깨로 보고 있다. 거기에는 시인의 특수한 경험이 작용한다. 바로 홍두깨질 혹은 다듬이질과 관련된 어머니의 시집살이이다. 시 속 화자가 뒤뜰에 맺히는 한 송이 방망이즉 옥잠화를 보았는데, 꽃을 보자 곧바로 하얀 기억이 솟아오른단다. 바로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다.

화자의 어머니는 시집살이를 심하게 했던 모양이다. ‘구름 피는 날이면 빨래를 두들겨야 했다. ‘시어머니의 구박에 구겨졌던 홑청이자식 즉 어린 화자의 배냇짓으로 말끔히 펴지지만 헤프게 불어오는 실바람에 / 풀 먹인 시집살이가 실려 온다고 한다. 시집살이 - 홑이불 빨래를 하고 이를 홍두깨에 말아 두들기며 혹은 다듬이돌에 얹어 두들겨 펴야 했을 것이다. 시어머니 구박에 홑청은 구겨지지만 이내 갓난아이 배냇짓을 보면 말끔하게 펴진다. 며느리와 엄마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구박에 대놓고 볼멘소리를 할 수도 없다. 그러니 혼자 구시렁거렸을 것이고 그런 볼멘소리 숨겨주던 다듬이 소리는 / 초록 다듬잇돌 등살에서 / 바삭바삭 익어갔단다. 그렇게 시어머니에 대한 화를 삭였을 것이리라. 그런 시집살이를 하던 어머니 - 지금은 가고 없다. 화자는 늦더위 햇살에핀 옥잠화를 보고 까맣게 잊었던 그리움이옥잠화의 꽃대에서 또가닥 또가닥 쏟아졌다고 한다. 그 그리움이란 바로 어머니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제는 / 잔소리도 내려놓으시고’ ‘선산 아래에서 긴 꽃잠을 주무시고 있단다.


달빛 어두운 그믐밤화자는 문득 어머니가 흘기던 눈빛만 처녀자리에서 반짝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바로 그믐밤에 보는 옥잠화의 모습이다. 옥으로 만든 비녀를 연상하여 옥잠화라 불렀는데, 시를 읽고 보면 정말 꽃모양이 홍두깨 혹은 다듬이 방망이 모양과 흡사하다. 그러니 시인은 꽃을 보는 순간 어머니가 두들겼던 다듬이 방망이 혹은 홍두깨를 연상했으리라. 게다가 그 방망이에는 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배어 있다.


이 시에서 눈길이 가는 표현이 있다. 바로 행갈이의 묘미인데, ‘하얀 기억이 솟아오른다 뭉게뭉게 / 구름 피는 날하얀 기억이 솟아오른다 / 뭉게뭉게 구름 피는 날이라고 하면 평범할 것이지만, ‘뭉게뭉게를 도치하여 기억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에도 연결이 된다. ‘꽃대에서 또가닥 또가닥 쏟아진다 이제는 / 잔소리도 내려놓으시고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은 쏟아지는 것과 잔소리 내려놓으신 것 둘 다에 연결이 되고 있다.

시는 이렇게 옥잠화’ - ‘옥비녀꽃을 홍두깨 혹은 다듬이 방망이로 새롭게 그려낸다. 사물의 재해석이다. 그리고는 그 바탕에 어머니가 겪었을 시집살이와 함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펼쳐 놓았다. 그러니 참 멋진, 아름다운 시로 승화되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