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지하의 <무화과>

복사골이선생 2018. 9. 6. 11:2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15)







무화과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그게 무화가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무화과(無花果)는 글자 그대로 꽃이 없이 맺은 열매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은 과일이 아니라 뒤집힌 꽃이다. 무화과나무는 사과나 배 혹은 복숭아와 같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대신 배 모양의 꼬투리 안에 꽃을 피우고, 그게 자라면 우리가 먹는 무화과가 된다. 우리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 안에 분명 꽃이 있고 그것이 수정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학자들 말에 따르면 꽃 하나마다 씨가 하나 있고 껍질이 단단한 과일 하나를 만드는데 그걸 수과(瘦果)라고 한단다. 그런데 우리가 무화과를 먹을 때 바삭바삭한 느낌을 내는 것이 이 수과란다. 즉 무화과 하나는 여러 개의 수과로 이루어져 있어 우리는 무화과를 먹을 때 과일 여러 개를 한꺼번에 먹는 셈이란다.


김지하의 시 <무화과>는 이런 무화과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그려낸다. 시의 내용을 따라가 보자. 시 속 화자는 친구와 술을 마셨던 모양이다. 술이 과했는지 돌담에 기대어 토하고 났는데 돌아보니 잿빛 하늘이란다. 암울한 시대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하늘마저 무화과 한 그루가가리고 있다.

여기서 문득 화자는 친구와 대화를 나눈다. 먼저 화자는 내게 꽃 시절이 없었다고 투덜댄다. 그러나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무화과라며 자신이 무화과와 같은 신세라고 하소연한다. 아름다운 젊음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암울한 현실에 뛰어든 화자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어떤가라며 친구에게 동의를 구하지만 친구의 말은 다르다. 오히려 무화과가 열매를 맺는 과정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친구의 말인 즉, ‘열매 속에서 속 꽃 피는 게 / 그게 무화가 아닌가라며 똑같이 어떤가라고 되묻는다. 꽃 시절이 없었다는 친구에게 열매 속에서 속 꽃이 핀다는, 즉 밖으로 꽃을 피우는 삶보다 더 값진 것이 속으로 꽃을 피우는 삶이며, 그게 무화과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화자는 동의를 구하려 어떤가라 물었지만 친구는 화자를 위로하려 어떤가라 말한다. 어쩌면 친구 역시 화자와 같은 입장일 것이다.

화자가 동의를 했건 안했건 다시 둘은 검은 개굴창가 따라 / 비틀거리며 걷는다.’ 둘이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그만큼 암울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현실이 힘겨울 것이란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에 어둠의 세계에 익숙한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뜬금없이 도둑고양이는 왜 나왔을까. 화자와 친구는 밝은 세계를 갈망하지만 도둑고양이는 어두움에 익숙하다. 아니 오히려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에서 활동이 활발하다. , 어두운 현실에 약삭빠르게 잘도 살아가는 정치인이나 악덕 자본가 같은 사람들이지 않을까. 그러니 화자나 친구 두 사람의 앞날이 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겉으로 드러난 시의 내용이래야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친구가 술을 먹고 고통스러워하자 다른 친구가 그를 위로하며 달랜다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의 내면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럴 때에 무화과는 한 인간의 내면적 성숙 그리고 자기 성찰을 환기하는 상징적 소재가 된다.

자신의 삶을  ‘무화과에 빗대어 아름다워야 할 젊음을 즐기지 못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화자. 그러나 이내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발견해 낸다. 바로 비록 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무화과지만 실은 그 속이 바로 꽃이란 사실이다. 화자는 도둑고양이 같은 놈들이 날쌔게 움직이는 암울한 시대에 무화과로서 비틀거리는 존재이지만 무화과는 어떤 상황에서도 속 꽃을 피우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속 꽃을 피워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열매를 맺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속 꽃을 피우고 있다는 무화과 - 시인은 자신의 자아성찰 혹은 내면의 성숙을 바로 이 무화과로 환치시켜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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