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승희의 <호박>

복사골이선생 2018. 9. 5. 08:2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14)








호박

 

이승희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걸까

제 속 가득 씨앗들 저리 묻어두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지.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본다

사리처럼 박힌

단단한 그리움.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며 성격은 물론 인상까지 점차 변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중년을 넘어서면 성격도 누그러지고 얼굴이나 체형까지 점점 둥글게 변하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턱이나 이마는 둥글게둥글게 변하고 빛나는 눈빛은 점차 무뎌진다. 좋게 말하면 불혹(不惑)’을 지나며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인데 달리 보면 그만큼 세상사를 겪으며 모난 부분이 깎여 둥근 모양을 띠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승희의 시 <호박>늙은 호박을 나이 든 사람 -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같은 어른들로 환치시키고 있다. 시인은 늙은 호박이 온 생애를’ ‘엎드려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 단풍과 마른풀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 엎드려만 있었다는 것이다. 엎드려 무엇을 했을까. 속에는 씨앗들을 가득 안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니 나이를 먹으면 체형도 성격도 특히나 얼굴이 둥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늙은 호박이 둥근 이유와 마찬가지이리라.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들은 젊은 시절에는 마르고 날카로운 얼굴이었을지 모르나 불혹을 넘기고 점차 늙어가며 둥글어진다. 젊은 시절 내세우던 자신의 뜻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족이나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다. 세상의 모든 유혹 다 거부하고 오로지 자식들 키우는 데에 매진했으니 그러는 동안 성격은 물론 체형까지 둥글어질 수밖에 없다.

늙은 호박을칼로 가르면 그 둥글고 환한 속을보게 되는데, 그 속이란 노란 살과 함께 여문 씨앗들이 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은 사리처럼 박힌 / 단단한 그리움으로 파악한다. 그 그리움은 바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키워낸 자식들이다. 그러니 사리가 된다.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흔히 늙어간다고 하는데 실은 늙은 호박처럼 익어가는 것이리라. 그 안에 사리처럼 박힌 그리움, 젊은 시절의 온갖 유혹을 물리치고 오로지 자식들을 키워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시인은 밭에 뒹굴고 있는 늙은 호박을 보며, 아니 호박을 갈라 그 안을 보며 어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시를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찌 이런 생각을…… 하며 감탄을 하게 된다. 그러니 시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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