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구재기의 <으름넝쿨꽃>

복사골이선생 2018. 9. 5. 02:4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12)






으름넝쿨꽃

 

구재기

 

이월 스무 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러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의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들이 시집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 속으로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

지금은 어머니와 두 형들의 혼을 모아

쭉쭉 뻗어나가고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는 으름넝쿨꽃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담자색 으름넝쿨꽃

 

 

으름덩굴은 쌍떡잎식물 미나리아재비목 으름덩굴과의 낙엽 덩굴식물로 그 열매를 으름이라 한다. 황해도 이남의 전국 산과 들에서 자라는데 길이가 약 5m에 이르기도 한다. 가지는 털이 없고 갈색인데, 잎은 다섯 개씩 넓은 달걀 모양이거나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끝이 약간 오목하다. 꽃은 암수한그루로 45월에 자줏빛을 띤 갈색으로 피며, 열매는 긴 타원형이고 10월에 자줏빛을 띤 갈색으로 익는다. 관상용으로 심으며 과육(果肉)은 먹을 수 있고, 덩굴은 바구니를 만드는 재료로 쓰며, 한방에서는 뿌리와 줄기가 소염 · 이뇨 · 통경 작용에 효능이 있다하여 약재로 쓴다.

구재기의 시 <으름넝쿨꽃>은 이 으름덩굴의 꽃에서 연상된 시인의 가족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넝쿨은 표준어 덩굴의 속어이다. ‘으름덩굴꽃을 본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시인은 그 꽃을 보고는 사망 혹은 출가에 따른 호적의 빨간 줄을 연상했던 모양이다. ‘으름덩굴꽃의 꽃술이 마치 호적에 그어져 있는 빨간 줄을 연상시켰으리라.

그렇다면 시 속 화자의 가족사는 어땠을까.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들그리고 다섯 누이들이 시집가서호적에는 붉은 줄로 남아 있다. 그런데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이지만 화자는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으로 자라 지금은 어머니와 두 형들의 혼을 모아 / 쭉쭉 뻗어나가고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서는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 담자색 으름넝쿨꽃이 되어 있다.

그런데 호적을 보는 날이 이월 스무 아흐렛날이다. 229- 양력으로는 4년에 한 번 있는 날, 즉 윤년에 태어난 모양이다.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에 올라 있는 화자의 운명이 태어난 날까지도 참 기구하다. 그러나 비록 붉은 줄로 그어져 어머니, 형들 그리고 시집간 누이들이 지금 옆에 없지만 호적에는 어머니의 아들로, 형들의 아우로, 누이들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혈육들이 일찍 죽고 누이들은 시집을 갔지만, 살아 있기에 누이들과 웃으며 지난날을 추억하며 잘 살고 있다. 그냥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두 형들의 혼이 도와서인지 쭉쭉 뻗어나가고있다. 그냥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가시투성이 탱자나무까지 칭칭 감아버리는 것이다.

으름덩굴이 약한 것 같지만 이렇게 줄기줄기 뻗어나가 꽃을 피운다. 그렇게 화자도 굳게 잘 살고 있다는 믿음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원천은 바로 먼저 간 어머니와 형들 그리고 함께 살며 웃음으로 응원하는 누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으름덩굴꽃을 보고는 문득 호적의 붉은 줄을 연상했고, 이어 먼저 간 혈육들을 생각하며 문득 가족사를 털어놓는 시인 - 어쩌면 시인 자신의 자기 위안일 것이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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