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재무의 <감자꽃>

복사골이선생 2018. 9. 13. 15:09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22)







감자꽃

 

이재무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고

마음으론 울고 있구나 향기는,

저 건넛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 버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오지에 서서 해 종일 누구를 기다리는가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고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데

불임의 여자. 내 길고 긴 여정의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

노을 속 찬란한 비애여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

꽃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

 

 

농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감자도 꽃이 판다는 것을 잘 모른다. 감자를 심는 것은 꽃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자를 캐기 위한 것이니 그렇다. 그런데 분명 감자도 꽃이 핀다. 감자만이 아니라 모든 채소 아니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운다. 꽃은 바로 그 식물의 생식기이기 때문이다. 꽃을 피워야 곤충들에 의해 수정이 되고 그래야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당연히 감자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감자 열매

물론 감자꽃은 종자번식을 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농사꾼들에겐 감자종자 즉 감자 열매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감자농사는 종자파종이 아니라 덩이뿌리인 하지감자를 겨울 동안 보관했다가 이듬해 봄에 땅에 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사꾼은 감자꽃이 피면 꽃을 다 따버린다. 감자의 생육에 방해가 되기에 그렇다. 감자꽃을 따주어야 꽃으로 가는 영양분이 감자알을 더 굵게 한다.

이재무의 시 <감자꽃>에서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쓸모없는 감자꽃을 불임 여성으로 환치시킨다. 시 속에는 한 여자의 생애가 들어 있다. ‘차라리 피지나 말걸여자로 태어나 성인이 되어 결혼을 했는데, 그렇게 꽃 피어 더욱 서러운 여자이다. 결혼 생활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주색 고름 물어뜯으며 눈으로 웃었지만 정작 마음으론 울고 있. 여자로서의 향기는, / 저 건넛마을 장다리꽃 만나고 온 / 건달 같은 바람에게 다 앗겨 버렸단다. 남편이 바람둥이였던 데다가 여자는 눈부신 생의 환희 앓고 있는’ ‘불임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비탈 / 오지에 서서 해 종일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 소박을 맞았을 것이리라. 그러나 운명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 생산에 저리 분주하지만, 즉 아이 낳고 행복하게들 살고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느낄 슬픔과 그에 따른 고통이다. 그런데 시 속 화자, 아니 시인에게는 내 길고 긴 여정의 / 모퉁이에서 때 묻은 발목 잡고 / 퍼런 젊음이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내 여자이다. 발목 잡고 우는 것으로 보아 시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여인인 모양이다. 독자들은 시인의 아내나 누이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시인이 잘 알고 있는 어떤 여인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여자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시인이기에 노을 속 찬란한 비애라 말한다. 정말이지 차라리 여자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을…… 그러니 차라리 피지나 말걸 감자꽃이요 결혼이라는 꽃을 피워 더욱 서러운 여자인 것이 아니겠는가.

종족보존을 위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감자, 그러나 정작 종족의 보존은 열매가 아닌 씨감자가 대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했고 남편과 합방을 하였으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자. 감자꽃을 불임 여성으로 환치시킨 시인의 통찰력이 놀랍다. 시를 읽고 나서 만난 감자꽃들이 왜 그렇게 슬퍼보이는지 모르겠다. 흰색이라 더 그랬을 것이지만, 시인이 읊은 불임의 고통을 들은 것이 무의식중에 뇌리에 남아 있어 꽃까지 슬퍼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