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광규의 <대추나무>

복사골이선생 2018. 9. 18. 15:4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25)






대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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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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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그럴 수 있을까

쇠나 플라스틱이 그럴 수 있을까

수많은 손과 수많은 팔

모두 높다랗게 치켜든 채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마음 벌거벗은 몸으로

겨우내 하늘을 향하여

꼼짝 않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겨울이 지쳐서 피해 간 뒤

온 세상 새싹과 꽃망울들

다투어 울긋불긋 돋아날 때도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다가

초여름 되어서야 갑자기 생각난 듯

윤나는 연록색 이파리들 돋아 내고

벌보다 작은 꽃들 무수히 피워 내고

앙징스런 열매들 가을내 빨갛게 익혀서

돌아가신 조상들 제사상에 올리고

늙어 병든 몸 낫게 할 수 있을까

대추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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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나무는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목질이 단단하여 보통 판목(版木)이나 떡메, 달구지 재료로 쓰인다. 보통의 대추나무는 물에 뜨는 데에 비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물에 가라앉는데 이 나무로 도장을 새겨서 쓰면 행운이 온다 하여 비싼 값을 받기도 한다. ‘대추나무 방망이는 어려운 일에 잘 견뎌 내는 모진 사람을, ‘대추씨 같은 사람은 키는 작으나 성질이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을 가리키는 데에 나타나듯이 우리 문화에서 대추나무는 단단함을 상징한다.


다른 나무에 비해 꽃이 많이 피는데 암수 한 몸인 꽃이기에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즉 헛꽃이 없다. 그래서 태어나 반드시 자식을 낳고 죽는다 하여 다산(多産)을 뜻하는 대추를 혼례 폐백에 쓴다. 특히 대추의 붉은 색은 곤룡포를 뜻하고, 몸집에 비해 씨가 크고 하나뿐이어 임금을 상징한다 하여 제사상 첫머리에 놓인다. 게다가 날로 먹거나 떡 · 약식 등의 요리에 이용하며 9월에 따서 말린 것을 한방에서는 기력부족 · 전신통증 · 불면증 · 근육경련 · 약물중독 등의 예방과 치료에 쓴다.


김광규의 시 <대추나무>는 제목에 대추나무를 제시하고 이를 예찬하고 있다. 그러나 대추나무 재질의 단단함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시인은 대추나무를 바위, 쇠 그리고 플라스틱에 견준다. 겨울에 대추나무를 보면 당연히 잎도 없지만 곧 부러질 듯한 앙상한 가지들만 있다. 그렇게 빈 마음 벌거벗은 몸으로 / 겨우내 하늘을 향하여손과 팔을 치켜든 채 꼼짝 않고 서 있을 수 있. 바위, 쇠 그리고 플라스틱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들 알고 있듯이 대추나무의 꽃은 늦게 핀다. 시 속에 나오듯이 봄이 오면 온 세상 새싹과 꽃망울들 / 다투어 울긋불긋 돋아나지만 대추나무는 초여름 되어서야잎이 나고 그런 다음에 벌보다 작은 꽃들 무수히 피워낸다. 늦된 것이 더 알차다고 하지 않는가. 봄꽃이 다 진 뒤에야 겨우 꽃을 피우지만 그렇게 늦게 핀 꽃들은 앙징스런 열매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을 가을내 빨갛게 익혀서 / 돌아가신 조상들 제사상에 올릴 수 있게 한다. 어디 그뿐인가. 차로도 달여 마시고 한방에서는 약으로도 쓰인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의 늙어 병든 몸 낫게 할 수 있는 것이 대추이다.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대추나무가 아니라면 정말 /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라고. 겨우내 빈 몸으로 하늘을 향해 손과 팔을 들고 있는 것, 늦게 꽃을 피우지만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약으로도 쓰게 하여 병든 몸을 보살필 수 있게 하는 나무 - 그것이 바로 대추나무의 덕성이란다. 사실 더 자세히 살피면 대추나무의 이점이 그것뿐이겠는가.

그런데 왜 시인은 대추나무를 바위, 쇠 그리고 플라스틱과 견주었을까. 바위나 쇠는 대추나무보다 강하기는 하지만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 아주 유용하게 쓰이는 플라스틱도 마찬가지이다. , 바위, , 플라스틱은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대추나무는 겨우내 빈 몸으로 추위를 견뎌내고 초여름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가으내 키워 그 열매로 인간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 내추나무가 아니면 무엇이 그럴 수 있을까라 반복하여 자문하는 것이리라.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단단한 재질, 다산과 임금의 상징 등 더 의미 있는 특징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평범한 상식보다는 시인의 눈으로 인식한 대추나무를 묘사하며 예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