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허수경의 <오이>

복사골이선생 2018. 11. 29. 00:0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70)






오이

 

허수경

 

어라,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은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을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오이는 쌍떡잎식물 합판화군 박목 박과의 한해살이 덩굴식물로 인도의 북서부 히말라야산계가 원산지이나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식용작물이다. 줄기는 능선과 더불어 굵은 털이 있고 덩굴손으로 감으면서 다른 물체에 붙어서 길게 자란다. 잎은 어긋나고 잎자루가 길며 손바닥 모양으로 얕게 갈라지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거칠다. 꽃은 단성화로 56월에 노란색으로 피고 지름 3cm 내외이며 주름이 진다. 열매는 장과(漿果)로 원주형이며 어릴 때는 가시 같은 돌기가 있고 녹색에서 짙은 황갈색으로 익는다.

허수경의 시 <오이>는 이 오이의 덩굴이 자라고 꽃이 피며 오이가 맺히기까지의 과정을 천연덕스런 놀라움으로 그려낸다. 그 천연덕스런 놀라움이란 첫 행 어라,’란 감탄사에서 나온다. 이 감탄사는 시 속에서 여섯 문장에 연결된다. 그 여섯 문장은 하늘을 더듬더라’, ‘피기 시작하더라’, ‘마을로 돌아오더라’, ‘향기가 나더라’, ‘화반에서 돋아나더라그리고 쪼그리고 앉더라이다. 즉 여섯 개의 행위에 다 어라,’란 의외의 놀라움이 천연덕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우선 아직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에서 놀라움이 시작된다. 곧이어 그때 노란 꽃은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에 이어진다. 화자의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기에 놀랍다는 뜻이리라. 오이 싹이 자라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덩굴손이 자라 하늘로 향하고 그럴 때에 노란 오이꽃이 핀다. 그러나 아직 여름은 아니다. 봄의 끝자락, 그때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바다의 향기를 품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온다.

새들이 바다로 나가 바다향을 품고 와 오이에게 주었던 모양이다. 아니 시 속 화자는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러니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는 것이리라. 그렇게 오이꽃이 만발할 즈음 바다에 빠진 태양빛이 파도에 아른거리듯 새들의 재재거리는 수다도 그럴 것이리라. 그때 오이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는 것이다. ‘오이 멍울이 돋아났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미 암꽃과 수꽃의 수정이 이루어진 모양이다.


바야흐로 여름이 시작되고 그 노란 꽃 가녘에 /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는다. 오이를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대부분의 열매가 꽃이 피고 수정이 된 후 꽃이 진 다음에 열매가 맺히는데 오이는 오이 멍울이 자랄 때에도 꽃은 그대로 있다. 그러니 나비는 오이 멍울이 자라고 있는 꽃에 앉은 것이다. 그런데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쪼그리고 앉는단다. 스스로 옷을 벗는 여인의 행위처럼 에로틱하기까지 하다. 맞다. 나비는 지금 오이꽃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이미 오이가 맺혔으니 그것은 정상적인 암수꽃의 수정이 아니라 먼 사랑이 될 것이요, 그러니 맺혀 있는 오이는 기어이 휘어지게 된다. 그러나 나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이꽃과 사랑을 나눈다. ‘오이가 열리든 말든관심이 없다. 오이가 열리게 수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을 나누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리라. 어린 오이는 휘어져 있다. 그리고 끝에 아직 꽃을 달고 있다. 거기에 앉은 나비 - 이를 사랑으로 표현하고 오이가 열리든 말든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하는 시인의 감각이 참 재미있다.


오이에서 나는 향이 바다의 향이라고, 그 바다 향은 바다로 나간 새들이 가져와 오이꽃에 준 것이고, 오이꽃에 앉은 나비가 꽃과 사랑을 나누고…… 그러한 과정을 어라,’하며 놀라움으로 표현한 시인의 감각과 재치가 참 좋다. 게다가 ‘~~한다가 아니라 ‘~~하더라라는 종결어미가 그 감각을 더해준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어라,’가 곳곳에 연결되며 오이꽃이 피고 오이가 맺히고 자라는 하나하나의 과정이 모두 의외의 놀라움이다. 정말 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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