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정희성의 <백년초>

복사골이선생 2018. 11. 27. 19:3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68)






백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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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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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은

어떤 힘으로 응축하여야

이 신화 같은 노란 빛깔로 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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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혈진 원한은 이쯤에서 밀어 넣자

남루한 살갗 아래 두고두고 묵혔다

외마디 비명은 뿔가시로 뽑아내고

풀어도풀어도 억울한 단 한가지만큼은

제주 물사람 숨비 소리로

숨 바삐 뿜어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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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바람 사이 밤이 닫히고

너는 피고 나는 기어코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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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바람 센 날 어느 겹담 위

편한 날숨소리 팔랑인다면

편한 잠 누군가 묵고 간 기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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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초는 멕시코가 원산인 선인장의 한 종류인데 줄기 모양이 손바닥처럼 넓적한 형상을 하고 있어 흔히 손바닥선인장이라고 부르며, 이를 제주도에서는 백년초라 부른다. 4~5월경에 작고 파란 열매가 열려 5~6월경에는 열매에 노란 꽃이 핀다. 잎처럼 보이는 부분은 줄기이고 가시는 잎의 변형이다. 특히 1976년에 제주도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데, 옛날 멕시코에서 해류를 타고 제주 서쪽인 월령리 해안가에 밀려와 모래틈과 바위 사이에 부착하여 번식 · 자생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정희성의 시 <백년초>는 이 꽃을 통해 시인 나름의 한을 풀어내는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제주4.3사태와 관련지어 해석한 평자들이 많다. 물론 그런 평가가 가능할 것이나 시를 너무 획일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된다. 게다가 시인이 제주4.3사건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작가회의에서는 제주 4.3 시 모음집 <검은 돌 숨비소리>를 출간하여 4.3 사건 희생자들의 상처를 위로했는데 이 모음집에 정 시인은 그의 시 <너븐숭이>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 모음집 제목에 나오는 숨비 소리가 바로 정 시인의 시 <백년초>에 그대로 나온다. 이를 근거로 이 시가 제주4.3사건을 다룬 시로 해석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문단에 많이 알려져 있듯이 시인은 고교 교사를 정년퇴임한 후 제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제주로 이주하여 쓴 시를 중심으로 이미 2014년에 <지금도 짝사랑>이란 시집까지 출간했다. 그 시집에 이 <백년초>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 <백년초>를 제주4.3사건에만 연결시켜 해석하려 할까.


시를 보자. 시 속 화자는 백년초의 소망은 / 어떤 힘으로 응축하여야 / 이 신화 같은 노란 빛깔로 피려나?’라 묻는다. 소망에 특정 색이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신화 같은 노란빛은 화자의 눈에 신비롭게 보이기에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리라. 바로 백년초의 꽃 - 노란빛이 강조되는 구절이다.

여기서 시인은 노란 꽃을 피운 것으로 백년초의 소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러니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간 참아온 세월은 다 묻어두자고 한다. 노란 꽃을 피웠으니 울혈진 원한은 이쯤에서 밀어 넣자고 한다. 그 원한을 남루한 살갗 아래 두고두고 묵혔다 / 외마디 비명은 뿔가시로 뽑아내자고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풀어도풀어도 억울한 단 한가지만큼은 / 제주 물사람 숨비 소리로 / 숨 바삐 뿜어 올려라!’고 외친다.


숨비 소리라니. 해녀들이 물질을 하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가 아닌가. 그만큼 물속에서 참고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이지만 일반인들의 푸하고 내뿜는 소리와는 다르다. 소리마저 아름답다. 시에서는 원한, 외마디 비명, 억울함……을 참았다가 뱉어내는 소리가 되는데 이를 제대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극단적인 행동, 폭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게 하지 말고, 즉 욕지거리나 주먹질이 아니라 휘파람소리 같이 아름답게 뿜어 올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바람과 바람 사이 밤이 닫히고 / 너는 피고 나는 기어코 일어선단다. 가슴 속 한을 밀어 넣어 두고 대신 그것을 소망으로 바꾸어 노란 꽃을 피워내는 백년초, 그렇게 꽃을 피우는 것을 본 이후에야 편안하게 일어날 수 있는 화자이다. 어디 그뿐인가. ‘먼 바다 바람 센 날이면 곧 해일이 일거나 거센 파도가 덮칠지도 모른다. 그런 날에도 어느 겹담 위 / 편한 날숨소리 팔랑인다면원한, 외마디 비명, 억울함……을 소망으로 바꾸어 백년초가 꽃을 피워낸다면 그것은 편한 잠 누군가 묵고 간 기척이라는 것이다.


시인이 집중하는 것은 백년초 꽃와 가시이다. 울혈진 원한이라니 피맺힌 원한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원한을 그냥 뿔가시로 뿜어내고는 모든 한 서린 세월을 소망으로 담아 노란 꽃으로 피워내는 백년초. 시인은 백년초를 보며 ()’풀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그 한풀이가 폭력적이거나 극단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니 기껏해야 뿔가시로 뿜어내고, 숨비 소리로 그냥 휘파람 불 듯 토해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4.3 사건 희생자의 한이 백년초로 환치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4.3 사건에만 국한시켜 해석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 살아가며 왜 그런 한이 없겠는가. 모든 사람들이 겪는 삶 속의 한 -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총칼이나 주먹보다는 그저 뿔가시나 숨비 소리 더 나아가면 노란 꽃으로 피워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시인에게 백년초 노란 꽃은 그런 한을 세상 밖으로 풀어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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