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허수경의 <라일락>

복사골이선생 2018. 11. 30. 23:05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71)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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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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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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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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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

정말 죽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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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네

라일락, 웃다가 지네

나의 라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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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이 / 라일락 꽃향기 흩날리던 날 /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소……윤형주가 부른 <우리들의 이야기>란 노래를 듣기 전까지 라일락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몰랐다. 노래에 취해 막연하게나마 대학 교정에는 많은 모양이라 생각했을 만큼 당시 꽃에는 문외한이었다. ‘라일락이 외래종이라는 것, 우리 토종으로는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았던 수수꽃다리란 꽃이 있고 그것이 미국으로 건너가 품종이 개량되어 역수입된 미스김 라일락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훗날의 일이다. 이즈음 윤형주의 노래가 호주 출신 그룹 Seekers<Isa Lei>를 번안한 곡이란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아직도 라일락이라면 꽃보다는 윤형주의 노래가 먼저 떠오른다.

사실 라일락은 유럽 원산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심어 기르는, 물푸레나무과 수수꽃다리속의 낙엽성 작은키 나무이다. 꽃은 4~5월에 피는데 묵은 가지에서 난 길이 15~20cm의 원추꽃차례에 피며, 지름 8~12mm, 보라색 또는 연한 보라색을 띠고 진한 향이 난다. 화관은 깔때기 모양으로 끝이 네 갈래로 갈라지는데 세계적으로 많은 품종이 개량되어 있다.


허수경의 시 <라일락>에서는 이 꽃을 매개로 한 추억을 웃음으로 날려 보내는 화자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 속 화자가 어떡하지, / 이 봄을 아리게 / 살아버리려면?’이라고 라일락에게 묻는다. 어쩌면 라일락을 어떡하지로 이해할 수도 있다. 화자는 라일락을 통해 추억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란 다음 연에 나온다. ‘내 생애의 봄날다정의 얼굴로 / 날 속인 모든 바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자의 모습이 슬프다거나 아픈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아픈 추억 - 날 속인 모든 바람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고 있다. 그래서 라일락이 피는 봄에 예전처럼 또 아리게 살면 어떡하지라 물었던 것이다. 그 물음에는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담겨 있다. 그러니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이라 말하고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라 강조한다.

여기서 몰락을 글자 그대로 멸망하여 모조리 없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면 화자의 뜻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된다. 몰락은 오히려 예전의 날 속인 모든 바람을 다 떨쳐버리는 행위를 반어적으로 나타낸 것이리라. 그러니 신나게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스크랩북 안에 든 오래된 사진이라면 과거의 추억이다, 어쩌면 라일락꽃 앞에서 다정하게 둘이 찍은 사진일 수도 있다. 사진이 죽어버렸다고? 맞다. 그 사진 속 사람은 지금 옆에 없다. 사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 사진이 죽은 것이다. 그런 추억에 대하여 화자는 웃어버리는 거야, 라일락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시 한 번 아주 웃어버리는 거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화자는 정말 옛 추억을 떨쳐냈을까.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왜냐하면 공중에서는 향기의 나비들이 와서 /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처럼 웃는다고 한다. 즉 라일락 향기가 뜨겁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 시절의 추억을 가져와 웃고 있는 것이다. 말로는 다 떨쳐내자고 하지만 마음 어느 한 구석에는 아직도 그 시절 더운 숨을 내쉬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제 라일락꽃이 보인다. 내 추억이 서려 있는 라일락 - ‘라일락, 웃다가 지네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떨쳐내지 못한 아린 마음이 숨어 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나의 라일락이라 되뇌이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시가 참 싱그럽다. 화자가 추억하는 라일락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다시는 사랑의 아픔을 겪지 않겠다고, ‘다정의 얼굴로 / 날 속인 모든 바람에게 더는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 봄을 아리게 살지 않겠다고, 나아가 다 떨쳐내고 웃을 거라고 말은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라일락에 서린 옛사랑의 추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 아린 마음 때문일까. 시를 읽으면 문득 라일락 향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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