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윤진화의 <동백꽃>

복사골이선생 2018. 12. 9. 08:4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75)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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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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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어가 간다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 간다 칼춤 추던 사내에게 두들겨 맞은 뺨 벌그레하던 년이 간다 멍든 젖가슴 부끄러운지 모르고 자꾸 열어 보여주던 그 년이 간다 칼등에 날세워 자른 듯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린 독한 년,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내던 질긴 년, -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꽃잎 벌려 웃으며 간다 노란 중심 발기한 몹쓸 년이 저기, 저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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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끄러워라,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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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질 때 대부분의 꽃들은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는 데에 반해 동백(冬柏)은 꽃이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노인들의 방에는 두지 말라고 한다. 어느 날 툭 하고 떨어지는 꽃봉오리에서 갑작스런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란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동백나무에 피는 동백꽃은 다른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계절에 홀로 핀다. 주로 섬에 많이 자라는데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대청도까지 분포하며, 육지에서는 주로 충청 이남에 있지만 화분에 담아 서울에서도 키운다. 꽃은 주로 붉은 색인데 겨울에 꽃이 핀다 하여 동백(冬柏)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윤진화의 시 <동백꽃>은 꽃이 통째로 져버리는 이 꽃을 오필리어로 환치시킨다. 즉 꽃봉오리 채 떨어지는 동백꽃을 보고 오필리어가 간다고 하는데, ‘오필리아가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의 여주인공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연인 햄릿에게 살해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이 아닌가. 극 중에서 셰익스피어는 정신이 나간 오필리어의 상태를 강조하기 위해 그녀 스스로 여러 종류의 꽃(각각의 꽃에는 적절한 상징의미가 있다)을 꽂은 것으로 묘사해 놓았는데 훗날 존 에버렛 밀레이는 이를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손에 꽃을 꺾어 들고 강물 위에 누워있는 양 죽음을 맞고 있는 회화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시인은 동백꽃을 단순히 오필리어로만 비유하지 않는다. 동백꽃은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다. ‘멍든 젖가슴 부끄러운지 모르고 자꾸 열어 보여주던 그 년이요 칼춤 추던 사내에게 두들겨 맞은 뺨 벌그레하던 년이다. 오필리어까지 모두 네 여인인데 이들은 바로 동백꽃이 꽃봉오리 채 떨어지듯 죽는다. 그것도 칼등에 날세워 자른 듯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린 독한 년들로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들이다.

어느 정도로 독한 년들일까. 바로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내던 질긴 년이다. 이들은 -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주장하고 죽을 때에도 꽃잎 벌려 웃으며 간단다. 어디 그 뿐인가. ‘노란 중심 발기한 몹쓸 년들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 말 없다가 죽을 때에서야 아등바등 사는 삶은 다 거짓말이라 하며 꽃잎 벌려’ - 여성성을 마음껏 발산하며 남자들 보란 듯이 노란 중심 발기한 채 죽는 년들이다. 시인은 지금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년들이 땅에 떨어져 외치는 외마디들을 듣고 있다. ‘저기, 저어기,’ 그런데 이내 외면한다. ‘…… 시끄러워라, 동백,’이라면서.


시를 읽다 보면 문득 서정주의 시가 떠오른다.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이 간다는 분명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禪雲寺洞口)>에 나오는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에서 빌어온 것이리라. 그러나 이를 표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 전체 내용으로 보아 서정주의 시 구절을 유효적절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필리어를 비롯한 나머지 들을 보면 육자배기 가락 시끄러운 막걸리 집에서 젊은 시인과 잔 치던 목 쉰 년과 동일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모두가 남자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고는 끝내 동백꽃 꽃봉오리 채 떨어지듯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인들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러니 제 목숨 달린 모가지 툭. 깨끗이 저버리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할 말이 없었겠는가. 있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남자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땅에 고꾸라져서야 툭. 외마디 뱉어낸다. 동백꽃의 동()과 애타게 발 구르는 모습 동동을 연결하여 한 마디 한다. ‘- 발 구르며 붙잡는 생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 말도 그렇지만 죽는 모습도 기이하다. ‘꽃잎 벌려 웃으며라든가 노란 중심 발기한모습은 어쩌면 삶에 대한 부정을 희화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남자들을 향한 강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동백꽃의 낙화를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연을 달리한 마지막 행에 나오는 말줄임표에 이어지는 말이다. ‘…… 시끄러워라, 동백,’ 말줄임표 안에는 떨어진 동백꽃 아니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인들의 마지막 절규 혹은 외침이 담겨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러니 화자는 시끄러워라, 동백이라 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했다. 그러나 시 속 네 여인들의 외침은 사랑에 목마른 여인들이 남자들을 햐한 절규이다. 그것을 알기에 입 다물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새빨간 동백꽃, 꽃봉오리 채 떨어진 동백꽃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여러 여자를 그려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게다가 그들을 독한 년’ ‘질긴 년이라 부르며 나무라면서도 역으로 그들의 절규를 대변해주며 눈물지을 시인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존 에버렛 밀레이 作, <오필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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