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손순미의 <칸나의 저녁>

복사골이선생 2018. 12. 12. 00:1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80)




칸나의 저녁

 

손순미

 

찬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었다 소스라치게 피었다 체한 것이 아닐까 아닐까 했을 때 붉은 꽃의 성대에서 칸나가 피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다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았다 공포와 수치심이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는 어두웠다 야광의 안구를 갈아 낀 고양이가 뒤꼍으로 돌아나가고 나는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다

 

칸나가 피었다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 지나 나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다 칸나가 어둡다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온다

 

 

사람들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흔히 여성이 겪는 생리통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단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출산의 고통이다. 그 고통이 두려워 혹은 몸매 유지를 위해 제왕절개를 한다지 않는가. 그만큼 출산의 고통과 생리통은 남자들이 헤아리기 힘든, 여성이기에 이겨내야 하는 숙명이리라.

손순미의 시 <칸나의 저녁>은 생리통 혹은 출산의 고통을 칸나의 붉은 색으로 그려낸다. 시의 첫 연은 초경에 대한 기억이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더운 바람이 불어오는 날 찬물에 밥을 말아먹고는 배가 아팠다고 한다. 체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마침 뜰에는 칸나가 보였다. 그것도 붉은 꽃의 성대에서피었단다. 그리고 초경을 했다. ‘터져 나오는 자궁의 홍등(紅燈)을 어쩌지 못한 나는 주근깨가 많은 소녀였단다. 초경을 터져 나오는 자국의 홍등(紅燈)’이라고 한다. 역시 시인이다.

부끄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달은 아예 뜨지도 않은 밤에 수돗가에서 몰래 팬티를 빨지 않았을까. 배가 아프고 피를 흘렸다는 공포와 수치심이이 들 때 온몸에 스멀거리는 꽃의 향기까지 어두웠단다. 밤이니 고양이의 눈빛은 더 밝았으리라. 그리고 또 다시 몰려오는 복통 - ‘자궁이 쏘아대는 꽃폭탄에 배를 싸쥐고 누웠고 그대로 잠이 들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식구들은 밥을 먹고 있었단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초경인 것을 알고 성장하는 과정이니 어쩌면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밥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마당에 칸나가 피던 날 했던 초경은 그렇게 트라우마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세월이 흘렀어도 칸나만 보아도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겠는가. 매달 그렇게 월경을 하며 나이가 들었다. ‘뜨거운 태양의 여름이 칸나를 지진다 칸나의 음순이 붉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성인이 되었다는 뜻이리라.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드디어 십만 볼트의 전류가 내 자궁을 지지는 고통을느끼며 화자는 새끼를 낳은 어미가 되었단다.


칸나가 필 때 했던 초경이기에 화자에게 늘 칸나가 어둡게 느껴진다. 어디 그뿐인가. 칸나를 보면 출산의 고통, 바로 새끼를 낳은 공포의 추억이 몰려오는 것이리라. 트라우마로 작용한 칸나 - 화자에게 칸나의 붉은 색은 초경 이후 매달 생리 때마다 그리고 출산을 하며 흘린 핏빛이다. 그러니 당연히 공포의 추억으로 몰려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어찌 칸나를 보며 초경과 출산의 고통을 연결시켰을까. 시 속 화자처럼 시인에게 초경과 연관된 칸나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을까. 사실 모든 식물은 꽃을 피운다. 꽃은 그 꽃을 피운 식물의 생식기이기 때문이다. 꽃에서 수정이 이루어지고 그래야 열매를 맺지 않는가. 그러니 칸나의 생식기는 바로 칸나꽃이요 마침 색이 붉다. 여기서 시인은 초경과 출산 시의 핏빛을 칸나의 붉은 색에 연결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많고 많은 붉은 꽃 중에 칸나일까. 게다가 칸나의 저녁은 뭘까. , 그럴 수도 있겠다. 시인은 자신을 칸나로 보고 있다. 중년을 넘어 이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 그러니 제목처럼 칸나의 저녁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직도 초경 때 봤던 칸나에 대한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정말 트라우마가 되어 공포의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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