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유홍준의 <작약>

복사골이선생 2018. 12. 13. 10:49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83)




작약

 

유홍준

 

유월이었다

한낮이었다

있는 대로 몸을 배배 틀었다

방바닥에 대고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

간질을 앓던 이웃집 형이 있었다

꽃송이처럼 제 몸을 똘똘 뭉쳐

비비적거리던 형이 있었다

번번이 우리 집에 와서 그랬다

오지 말라고 해도 왔다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피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무작정 꽃피기만을 기다렸다

무작정 꽃송이만을 바라보았다

마루 끝에 앉아 오래 끝나도록 지켜보았다

 

 

작약(芍藥)은 쌍떡잎식물 작약과 작약속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 · 몽골 · 동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한 이 풀은 주로 산지에서 자라는데 높이 60cm 정도까지 큰다. 56월에 줄기 끝에 한 개씩 피는 꽃은 붉은색 · 흰색 등 다양한데 재배한 것은 지름이 10cm 정도나 된다. 수술은 매우 많고 노란색이며 열매는 달걀 모양으로 끝이 갈고리 모양이다. 꽃이 아름다워 원예용으로 키우며 그만큼 개량종도 많다. 뿌리는 진통 · 복통 · 월경통 · 타박상 등의 약재로 쓰인단다.

유홍준의 시 <작약>은 이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간질증세를 빌어 담아낸다. 시를 보자. 때는 유월이었고 한낮이었단다. 그런데 갑자기 있는 대로 몸을 배배 틀었다고 한다. 무엇이? 혹은 누가? 여기서 독자는 당황한다. 그 다음 이어지는 행이 방바닥에 대고 /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 / 간질을 앓던 이웃집 형이 있었다이다. 여기서 행갈이에 유의해야 한다. 행과 행이 어떻게 연결되며 한 행이 어느 행을 수식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시가 묘사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4행과 5방바닥에 대고 /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이 그러하다.

4. 5 행을 도치로 보아 앞의 행들에 연결시키면 유월 어느 한낮에 방바닥에 대고 /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 ‘있는 대로 몸을 배배 틀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몸을 배배 트는 모습이 마치 자위행위로 보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4, 5 행을 뒤에 나오는 문장에 이어진 것으로 이해를 하면 방바닥에 대고 /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 / 간질을 앓던 이웃집 형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웃집 형의 간질 증세가 마치 자위행위와 같았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사실 이는 시인의 의도이다. 두 군데에 다 연결해 놓고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하라는 의도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행들을 보면 분명해진다. 자위행위처럼 보인 것은 이웃집 형의 간질 증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어진 행에서 꽃송이처럼 제 몸을 똘똘 뭉쳐 / 비비적거리던 형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4, 5행은 앞의 세 행에 이어 읽어 유월 어느 한낮에 방바닥에 대고 / 성기를 문질러대는 자위행위처럼’ ‘있는 대로 몸을 배배 틀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몸을 배배 튼 사람은 누구일까. 아니 무엇일까.

여기서 유의할 것이 바로 이어지는 형의 행동들이다. 간질에 걸린 이웃의 형은 번번이 우리 집에 와서간질 증세를 보였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오지 말라고 해도 왔고 이웃이다 보니 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화자로서는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상한 냄새가 났단다. 이 때에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무작정 꽃피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이쯤에서야 이웃에 사는 형의 간질증세와 몸을 배배 틀며 피어나는 작약이 겹쳐진다.

화자의 눈에 간질 증세가 마치 작약이 피어나는 모습으로 보인 것이다. 이웃집 형이 화자의 집에 찾아와 처음 간질 증세를 보였을 때, ‘제 몸을 똘똘 뭉쳐 / 비비적 거리던행위가 어쩌면 유월 한낮이니 마침 막 피어나는 작약을 보는 느낌이었으리라. 화자로서는 간질을 앓는 형의 증세를 어찌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작약이 피어나려 몸을 배배트는 것도 어쩌지 못한다. 그저 무작정 꽃송이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형의 간질 증세가 멈출 때까지 아니 작약이 활짝 입을 열 때까지 마루 끝에 앉아 오래 끝나도록 지켜보는 일 외엔 무엇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시인은 어찌 작약이 피어나는 모습을 간질 증세와 겹쳐놓았을까. 간질이 무엇인가. ‘간질자체가 잘못된 용어는 아니지만 사회적 편견이 심하고, 간질이라는 용어가 주는 사회적 낙인 때문에 뇌전증이라는 용어로 바꿔 부른다는데, 뇌전증이란 발작을 초래할 수 있는 신체적 이상이 없음에도 발작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여 만성화된 질환이다. 때로는 거품을 뱉어내고 눈이 까뒤집히며 손과 다리가 뒤틀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끔찍하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증세가 가라앉기만 기다릴 뿐이다.


시인은 작약이 피어나는 모습을 간질 증세와 같은 것으로 봤을까. 아니면 간질 증세를 마치 작약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본 것일까. 어느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시의 제목이 작약이고, 이 작약이 피어나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시인이 직접 본 적이 있는 이웃집 형의 간질 증세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뻔히 눈앞에 일어나는 이웃집 형의 간질 증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 - ‘마루 끝에 앉아 오래 끝나도록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 바로 시인의 눈에 비친 작약이 피어나는 모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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