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나영채의 <맨드라미>

복사골이선생 2019. 1. 3. 04:0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97)




맨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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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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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빛에 감긴 꽃밭

그 밭머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색깔놀이 중인 꽃들

늦여름, 꽃숭어리 갈피마다 씨앗이 그득하다

빛과 바람이 머물다간 자리마다 꼭꼭 박힌 씨앗

이젠 발등으로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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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에 배송된 씨앗무더기

타오르던 태양과 날아든 벌 나비 품고

땅위에 몸을 눕힌다

어둠의 땅

그 속에서 까맣게 타버린 마음이 발아될 때까지

씨앗은 숨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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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덕 여름새가 날자 온몸을 곧추세운 맨드라미

한 움큼 씨앗을 흩뿌리고 있다

암호가 된 꽃씨, 바람이 물고 갈 때

나는 문득문득 여물어 가고

꽃들 사이에서

마음의 보풀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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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는 비름과 맨드라미속의 한해살이풀로 꽃 모양이 닭의 볏을 닮았다 하여 계관화(鷄冠花)’라 부르기도 한다. 전국 각지에 분포하며 아무데나 잘 자라는데 주로 관상용으로 화단에 심는다. 줄기는 높이가 90cm에 달하며 곧게 자라고 흔히 붉은 빛이 돈다. 꽃은 7~8월에 피고 대개는 붉은 색이지만 품종에 따라 홍색, 황색 또는 백색 등 여러 가지 색과 모양이 있다. 9~10월에 꽃차례가 충분히 크고 종자가 성숙한 때에 꽃을 잘라 햇볕에 말린 후 종자와 분리하는데 3~5 개의 종자가 나온다.


나영채의 시 <맨드라미>에서는 꽃밭에 핀 이 꽃을 보며 여물어가는 시인을 그리고 있다. 시 속 화자는 지금 아침 햇살이 비치는 꽃밭 그 밭머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꽃밭에는 꽃들이 저마다의 색깔을 자랑한다. 마침 늦여름이다. 꽃이 지며 꽃숭어리 갈피마다 씨앗이 그득하단다.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리고 꽃을 피워 빛과 바람을 받으며 열매를 맺고 있는 화단의 꽃들이다. 그렇게 꼭꼭 박힌 씨앗 / 이젠 발등으로 떨군단다. 씨앗이 익어 저절로 땅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화단에 심은 꽃의 경우 저절로 씨앗이 떨어져 다시 심지 않아도 이듬해 봄이면 싹이 나는 경우가 참 많다. 때로는 새들이 먹고 변으로 나와 퍼지기도 한다. 가벼운 꽃씨들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화자가 저녁 무렵에 또 꽃밭에 나왔던 모양이다. 꽃씨들이 많이 떨어져 있는데 화자는 이를 해거름에 배송된 씨앗무더기라 하며 떨어진 꽃씨들이 타오르던 태양과 날아든 벌 나비 품고 / 땅위에 몸을 눕히는 것으로 본다. 씨앗들은 그렇게 떨어져 어둠의 땅에 묻히게 될 테고 그 속에서 까맣게 타버린 마음이 발아될 때까지 / 씨앗은 숨을 참는단다. 그리곤 이듬해 봄에 다시 땅을 뚫고 나오리라.


마침 여름새가 날았고 그 때 화자는 온몸을 곧추세운 맨드라미를 본다. 그 맨드라미가 한 움큼 씨앗을 흩뿌리고 있단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이 진술에는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맨드라미 씨앗은 저절로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꽃이 익었을 때 꽃을 따서 말린 후 비벼서 씨앗을 파내는데 그것도 꽃 한 송이에 3~5 개 정도이다. 그러니 한 움큼도 아니요 흩뿌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여기서 그런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 화자는 화단의 많은 꽃들처럼 맨드라미가 한 움큼 씨앗을 흩뿌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꽃씨들은 모양과 색깔 혹은 크기에 따라 저마다 다 다른 꽃을 나타내는 암호가 된. 그런데 화자는 꽃밭 밭머리에 앉아 꽃들을 보며, 게다가 암호가 된 꽃씨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지막 3행에서 독자는 알 수 있다. 가벼운 꽃씨를 바람이 물고 갈 때화자는 문득문득 여물어 가고 / 꽃들 사이에서 / 마음의 보풀이 가라앉는단다.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그 열매 - 씨앗을 떨구거나 바람에 실어 보내 번식을 하는 꽃들, 그 중에 맨드라미를 보며 화자 역시 여물어 간다. 여물기만 하는가, 마음의 보풀 - 여러 잡념마저 가라앉지 않겠는가.


꽃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피어나 열매를 맺고 그 열매 속에 씨앗을 품어 번식을 하는 모습을 보면 자연의 순환이란 커다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자연의 순리이다.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상념 속에 꽃밭에 앉아 꽃들이 영글어 씨앗을 떨구는 모습을 보며 화자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상념도 가라앉지 않았겠는가. 특히 암호가 된 꽃씨’ - 꽃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 각기 다른 씨앗을 만들어낸다. 인간도 그래야하지 않겠는가. 화자 역시 다른 이들과는 다른 그만의 정체성을 생각하면서 다른 잡념이 사라진 것이리라.


이를 화자는 자신도 여물어간다고 한 것이 아닐까. 꽃을 보며, 특히 맨드라미를 보며 여물어졌다는 화자 - 아주 작은 일에서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는 시인의 예리한 통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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