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문성해의 <능소화>

복사골이선생 2019. 1. 2. 21:0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95)




능소화

 

문성해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 머리를 올리고야 만다

목 아래가 다 잘린 돼지 머리도 처음에는 저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 본 적 없는 꽃들이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렇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서도

어제 밤 그 집의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고 한다

그 집의 주인여자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 가던 사내 등에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다고 한다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

 

우둘투둘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에는 벙어리이자 백치인 아다다가 나온다. 그녀는 친정이 지참금으로 내놓은 논마지기 힘으로 시집을 가는데 스물여덟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가난한 남편은 일생 먹을 것을 가지고 온 아다다를 흔쾌히 아내로 맞이한다. 흔히 말하는 지참금이 결부된 혼인인데,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고 요즘까지도 신랑이든 신부든 일정 부분 결함이 있는 경우 그를 보상할 만한 지참금을 더해 결혼을 시킨다. 문성해의 시 <능소화>를 읽다가 문득 아다다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제목이기도 한 능소화를 알아야 한다.


능소화과의 낙엽성 덩굴식물인 능소화는 담쟁이처럼 벽에 붙어 올라가며 자라기에 큰 것은 그 높이가 10m에 달하기도 한다. 하늘에 닿을 듯 뻗어갈 만큼 흡착력이 뛰어난데, ‘능소(凌霄)’하늘을 능멸하다란 뜻으로 그래서 하늘을 이기는 꽃이라 한다. 원산지인 중국에서는 금등화(金藤花)’라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 이 꽃을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다 하여 양반꽃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볼 수 있는 꽃이다.


시에서는 이 꽃을 어느 유곽의 반신불수 딸로 환치시켜 놓는다. 이 시를 읽으면서는 능소화반신불수 딸의 공통점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측백나무의 특성을 곁들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능소화는 덩굴식물이기에 홀로 서지 못한다. 반드시 옆에 든든한 나무나 담장이 있어야 한다. 시 속에 등장하는 반신불수 딸역시 홀로 서지 못한다. 그렇기에 많은 지참금을 줘서 시집을 보내지 않는가. 이에 비해 측백나무는 높이 25m에 굵기는 지름이 1m까지 자라는 아주 튼튼한 나무이다. 덩굴식물인 능소화에게는 측백나무야말로 타고 오르기 안성맞춤인 기둥이다.


시를 보자. 1 연에서는 능소화를 묘사한다. ‘담장이건 죽은 나무건 가리지 않고능소화는 덩굴로 감아 타고 올라서는 머리를 올리고야 만단다. 즉 꽃을 피운다는 뜻이다. 화자는 이를 돼지머리와 견주는데 능소화는 한 번도 아랫도리로 서 본 적 없는 꽃이다. 사실 오래 된 능소화의 밑둥을 보면 굳어버린 밧줄 같은데 그 모양이 징그럽기 짝이 없다. 돼지머리도 목 아래가 다 잘리기 전에는 능소화 줄기처럼 힘줄이 너덜거렸을 터이다. 그러나 돼지머리는 웃고 있고 능소화도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렇게 머리가 얹혀 웃고 있다.’ 즉 돼지머리나 능소화 모두 목 아래나 그 밑둥을 알지 못한다.

2 연은 반신불수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어제 밤에 머나먼 남쪽 어느 유곽에사는 반신불수 딸이 머리를 얹었다는데, ‘그 집의 주인여자즉 반신불수 딸의 어머니는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 가던 사내 등에 / 패물이며 논마지기며 울긋불긋한 딸의 옷가지들을 바리바리 짊어 보냈단다. 흠결이 있는 딸이니 총각에게 그만큼 보상을 해 준 것, 즉 지참금을 듬뿍 담아 보낸 모양이다. 그리고는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고 빌고 빌었으리라. 반신불수라는 흠결이 있는 딸, 그러나 딸이 잘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시인은 능소화와 반신불수 딸을 왜 견주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능소화나 반신불수 딸이나 혼자 힘으로는 결코 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능소화는 죽은 측백나무에 덩그렇게 머리가 얹혀꽃을 피웠고 반신불수 딸은 측백나무처럼 일없이 늙어 가던 사내에게 지참금 얹어 시집을 간다. 즉 능소화나 반신불수 딸이나 측백나무라는 기둥을 잡고 서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게 끝일까. 아니다. 시인은 능소화 꽃만 보고 이 시를 쓰지 않았다. 마지막 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둘투둘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도 /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단다. 맞다. 시인은 능소화 꽃만 본 것이 아니라 그 꽃이 필 수 있게 밑을 바치고 있는 꽃의 줄기 - ‘우둘투둘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버린 능소화 밑둥을 본 것이리라. 그 밑둥은 고사목처럼 늙어가면서도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 반신불수 딸을 시집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바리바리 지참금을 실어 보내면서도 어디 가서도 잘 살아야 한다고 빌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은 능소화 밑둥의 그것이리라. 다만 능소화나 딸은 밑둥과 어머니의 그런 희생을 알지 못한다.

결국 시의 제목은 능소화이지만 결코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능소화의 아름다움이 있기까지 우둘투둘한 늑골이 어느새 고사목이 되어버리는 능소화 밑둥의 희생을 그린다. 그 의미를 더하기 위해 시인은 슬그머니 반신불수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 이야기를 가져와 이어 놓은 것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연을 읽다 보면 어머니의 희생을 생각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반신불수 딸이 비록 걷지는 못하지만 측백나무 같은 남편을 만나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해마다 여름이면 발갛게 볼우물을 패는 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꽃은 능소화가 아니라 어쩌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그 딸이 낳은 아들딸이 아닐까.


어느 어머니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읽어가다가 문득 아다다를 생각했는데 결국엔 내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시 <능소화>. 어머니께 안부 전화나 한 통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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