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제인의 <홍시>

복사골이선생 2018. 12. 31. 06:30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93)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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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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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음만은 두고 가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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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헛디딜까

내 가는 길목마다 따라와

가난한 등불 하나

걸어 두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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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질 듯 농익은 저 붉은 기억들

죽어서도 나를 설레게 할

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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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날들

이젠 길 잃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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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紅枾)’란 생감의 떫은 맛이 자연적 또는 인위적인 방법으로 제거되어 붉은색으로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은 상태의 감을 말하는데 이를 연시(軟枾) 또는 연감이라고도 한다. 홍시는 붉은 색에서, 연시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질감에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홍시를 나무에 열린 채로 자연적으로 얻기는 힘들다 한다. 왜냐하면 감이 홍시가 될 때쯤이면 꼭지의 힘까지 약해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서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대부분의 홍시는 생감을 따서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인의 시 <홍시>는 나무에 달린 채 자연적으로 익은 홍시를 그려낸다. 날짐승에 대한 배려로 따지 않고 남겨둔 까치밥이리라. 하긴 홍시로 익었으니 까치를 비롯한 새들이 날아와 쪼아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시 역시 까치밥으로 남아 있는 홍시를 먹는 까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같다.

감나무 높은 가지 끝에 달린 홍시 - ‘까치밥을 보며 까치가 감나무 주인에게 그래도 / 마음만은 두고 가셨군요라 말한다. 그 마음은 다시 등불로 표현된다. 바로 까치가 발 헛디딜까염려한 감나무 주인이 까치가 가는 길목마다 따라와 / 가난한 등불 하나 / 걸어 두었다는 것이다. ‘터질 듯 농익은 저 붉은 기억들즉 까치밥으로 남아 홍시가 된 감들이다. 그리고 그 홍시에는 죽어서도 나를 설레게 할 / 그 목소리가 담겨 있다. 바로 까치를 걱정하는 주인의 목소리이다. 여기서 까치는 다짐을 한다. 주인이 남겨둔 까치밥을 먹고 힘을 얻어 날아 앞으로 남은 날들 / 이젠 길 잃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시 속의 내용을 까치의 말이 아니라 홍시를 사랑을 주던 임이 남긴 표지로 읽으면 어떨까. 임은 비록 떠나갔지만 나는 홍시를 보며 그래도 마음만은 두고간 것으로 읽어낸다. 임은 떠나면서도 나를 염려하여 내 가는 길목마다 따라와등불을 걸어두었다. 임이 남겨둔 마음 그리고 걸어둔 등불인 홍시를 보며 나는 임과의 사랑을 추억한다. 바로 터질 듯 농익은홍시 속에는 임과 나누었던 저 붉은 기억들이 있다 그것뿐이겠는가. ‘죽어서도 나를 설레게 할임의 그 목소리가 담겨 있다. 여기서 임에게 맹세를 한다. 떠난 임에게 이제는 더 이상 염려하지 말라는 부탁이기도 하다. ‘앞으로 남은 날들 / 이젠 길 잃지 않겠습니다란 다짐이다.


시를 까치가 감나무 주인에게 하는 말로 읽어도 좋고 사랑을 주던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어도 좋다. 어느 것이건 뜻은 통한다. 그런데 나는 임에게 주는 다짐으로 읽고 싶다. 특히 터질 듯 농익은 저 붉은 기억들이 그렇다. 사랑하던 임은 비록 떠나갔지만 흔들리지 않고 스러지지 않고 길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어찌 생각하면 감나무 높은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처럼 나 역시 임의 손길과 마음길 끝자락에 매어 있는 것이리라. 그만큼 임은 내 삶을 잡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까치밥으로 남아 홍시가 되어버린 감을 임이 두고 간 마음, 임이 걸어둔 등불 그리고 임과 나눈 붉은 기억들로 인식하는 화자. 게다가 임의 목소리까지 담긴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어찌 그렇게 생각을 했을꼬. 하긴 그러니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래 맞다. 사랑하던 임은 떠나갔지만 마음까지 거둔 것은 아니리라. 떠나면서도 나를 염려하여 마음으로 등불로 홍시를 걸어둔 임 -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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