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고영민의 <네트> - 탱자

복사골이선생 2018. 12. 27. 14:29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90)



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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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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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 울타리에

노란 탁구공들이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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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있는 힘껏 스매싱을 날렸는지

네트 한가운데

공은 깊숙이도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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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에 찔리며

겨루었던

너와의 길고도 힘겨웠던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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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탱자꽃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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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조심해도 너에게 손을 넣을 땐

매번 손등을 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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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를 처음 본 것은 한겨울 호남 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한적한 마을, 뾰족한 가시가 있으니 울타리로 탱자나무를 심어 나쁜 기운을 막는다 했다. 내게는 향긋한 기억만 떠오르는 탱자가 울타리였다니. 그 모양이 참 별스럽게 보였다. 어떻게 이런 나무에서 그 향긋한 탱자가 열릴까를 생각하니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 후 탱자나무에 핀 꽃을 만났다. 하얀 빛,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온 몸에 돋아난 가시, 그리고 아름다운 하얀 꽃, 그 꽃이 지고 노란 탱자를 맺는다고 생각하니 처음의 별스럽다는 생각보다 꽃과 나무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고영민의 시 <네트>는 이 탱자나무에 열린 탱자를 탁구 네트에 박힌 탁구공으로 환치시킨다. 어쩌면 시인은 잎도 다 져버리고 탱자만 열려 있는 나무를 본 모양이다. 노랗게 익은 탱자와 함께 잎이 무성한 9월이라면 탁구 네트로 상상하기는 좀 어려웠을 테니까. 시 속 화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탱자나무 울타리에 / 노란 탁구공들이 박혀 있단다. 이를 화자는 누가 있는 힘껏 스매싱을 날렸는지 / 네트 한가운데 / 공은 깊숙이도 박혀 있다는데 탱자나무 울타리가 탁구 네트이고 나무에 달린 탱자는 바로 네트에 박힌 탁구공이다. 아무리 세게 스매싱을 했다 하더라도 탁구 네트에 탁구공이 박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 안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시상이 잠시 달라진다. 바로 2연의 스매싱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분명 2연에서는 스매싱을 날린 사람을 모르니 누가라 했는데 갑자기 가 나온다. 그렇다면 스매싱을 받은 이는 이다. ‘가시에 찔리며 / 겨루었던 / 너와의 길고도 힘겨웠던 / -드라이브중에 스매싱을 하여 보낸 탁구공이 의 네트에 박힌 것이리라. 그렇다면 스매싱을 한 사람은 화자 즉 이다. 바로 너와 나가 겨룬 것이니 -드라이브이지 않은가. 그런데 가시에 찔리며는 언제 이야기일까. 다음 연에서 밝혀진다. 바로 ‘5월의 탱자꽃 시절부터이다.


탱자꽃 하얗게 피어 있던 5, ‘너와 나-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탱자나무에는 뾰족한 가시가 많다. 그러니 아무리 조심해도 너에게 손을 넣을 땐 / 매번 손등을 긁혔단다. 여기서 독자들은 눈치를 챈다. 탱자나무가 이고 화자는 ’ - ‘너와 나-드라이브…… 맞다. 사랑을 했다. 어쩌면 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으리라. 그러니 가시에 찔리면서도 아무리 사랑의 마음을 보내지만 울타리란 네트에 걸려 너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에게 보낸 사랑의 마음 - 손을 뻗으면 가시에 찔리기 일쑤이고, 강한 스매싱으로 보낸 사랑은 에게 가지 못하고 가 쳐놓은 울타리, 네트에 박혀있다. 강한 스매싱으로 보내기만 했던 화자의 를 향한 사랑의 마음 - 혹여 가 받았다면 이쪽으로 공이 건너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화자가 보낸 사랑은 네트에 걸려 박혀 있을 뿐 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시인의 상상력이 참 놀랍다. 어찌 탱자나무 울타리에 열린 탱자를 보고 네트에 박힌 노란 탁구공을 생각했을꼬. 하긴 그런 상상력이니 시인이 아니겠는가. 시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진다. 수없이 날렸을 강한 스매싱 - 그러나 전해지지 않고 네트에 박혀 있는 화자의 사랑. 짝사랑은 이렇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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