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선우의 <무꽃>

복사골이선생 2018. 12. 18. 15:42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87)




무꽃

 

김선우

 

집 속에

집만한 것이 들어있네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하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흐트러진 건 없는데 마음이 떨려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네

 

무꽃,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 돋아난 꽃대궁

 

사랑을 나누었구나

스쳐지나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가

너와 머물렀구나

빈집 구석자리에 담겨

상처와 싸우는

무꽃

 

 

무는 양귀비목 십자화과의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배추, 고추와 함께 식생활에 중요한 3대 채소로 재배된다. 종종 무에도 꽃이 피냐는 질문을 받는데 분명 무에도 꽃이 피지만 보기는 힘들다. 무는 꽃자루가 길이 1m 정도 자란 다음 가지를 치고 자주색 혹은 백색의 꽃이 피는데 봄 무나 가을 무(김장 무) 모두 꽃자루가 올라오기도 전에 수확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봄 무의 경우 종종 꽃을 볼 수 있지만 가을 무의 경우 겨울을 나기가 힘들어 꽃을 보기 더 힘들다.

김선우의 시 <무꽃>은 밭에서 자라는 무에 핀 꽃이 아니라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은 / 무 토막에 핀 꽃을 본 놀라움을 그려낸다. 첫 연에서 시인은 집 속에 / 집만한 것이 들어있네라 한다. 집 속에 들어 있는 집만한 것이 무엇일까. 2연에서 그 정체를 보게 된다. 시인이 여러 날 비운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놀다간 흔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 도둑이라도 들었나 하는 생각에 옷장을 열어보고 싱크대를 살펴봐도 / 흐트러진 건 없단다. 그러니 더욱 마음이 떨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잠시 주저앉아 숨 고르다 보았단다.

그 정체는 바로 무꽃이었는데, 조리를 하다가 남겨진 무를 버리기 아까워 사발에 담아놓고는 여러 날 집을 비운 사이 바로 사발에 담긴 그 무 토막에 사슴뿔처럼꽃대궁이 돋아난 것이다. 첫 연에서 제시한 집만한 것의 정체가 드러난다. 무 토막에서 꽃대궁이 돋아나고 거기서 꽃이 피었으니 시인은 이를 한 가정, 즉 집을 이룬 것으로 본다.

여기서 시인은 무 토막에 꽃대궁이 올라와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사랑을 나눈 것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랑일까. 무 토막이 담긴 사발을 스쳐지나지 못한 한소끔의 공기와 사발에 담긴 무 토막이 사랑을 나눈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물이 바로 무꽃이다. ‘한소끔의 공기’, ‘한 번 끓어오르는 모양혹은 일정한 정도로 한 차례 진행되는 모양을 가리키는 한소끔 -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한소끔의 공기는 차마 그냥 스쳐 지나가지 못하고 사발에 담긴 무 토막과 사랑을 나눈 것이리라.


그런데 시인은 이 무꽃을 빈집 구석자리에 담겨 / 상처와 싸우는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날 주인이 집을 비웠으니 빈집이요 구석자리이다. 게다가 온전한 무가 아니라 토막난 것이니 무에게는 상처가 된다. 상처를 아물게 하려 했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그 아픔 속에서도 한소끔의 공기와 사랑을 나눠 꽃을 피운 무 - 그러니 시인에게 무 그리고 무꽃은 경외로운 것이다.

마지막 연의 상처와 관련하여 어느 평자는 빈집에 적막을 안고 자란 잘린 무 토막에서 그 상처를 딛고 그 상처와 싸우는 것은 시인의 내적 갈등일 것이다. 자신과 무관하게 무수히 싹트는 감각들이 상처 받고 자라는 사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꽃피어 있음에 대한 삶이 시인의 상처가 되어 간다는 것이라 평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깊게 분석하여 의미부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시 속에는 시인의 상처라 할 표현이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독자는 그저 여러 날 집을 비운 사이 무 토막에서 돋아난 꽃대궁 그리고 피어 있는 무꽃을 보며 시인이 무 그리고 무꽃이란 생명에 대한 경외를 그린 것으로만 이해해도 충분하다.

시를 읽으면 여러 날 비운 집에 들어섰을 때의 낯설음이 생생하고, 그 낯설음이 두려움으로 변했다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무 토막에 핀 무꽃을 보며 느끼는 반가움과 놀라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화분에 꽃이 피었다 해도 반가울 터인데 사발에 담긴 토막 난 무에서 꽃대궁이 올라와 꽃을 피웠으니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전혀 기대하지 않던 것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과 같은 반가움이 현실감 있게 잘 그려져 있다. 한 편의 수필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시인의 표현력 때문이리라.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효치의 <광대나물>  (0) 2018.12.24
우형숙의 <군자란>  (0) 2018.12.19
도종환의 <라일락꽃>  (0) 2018.12.18
복효근의 <엉겅퀴의 노래>  (0) 2018.12.14
안준철의 <개망초 2>  (0) 2018.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