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김선굉의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복사골이선생 2018. 12. 30. 04:4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91)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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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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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긴 언덕을 따라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고 작은 꽃들이 키를 다투며 마구 피어나서

바람에 몸 흔들며 푸른 하늘을 받들고 있다.

白衣의 억조창생이 한 데 모여 사는 것 같다.

한 채의 장엄한 은하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흰 구름이 내려와 앉은 것 같기도 하다.

모여서 아름다운 것 가운데 이만한 것 잘 없으리라.

이따금 강바람 솟구쳐 언덕을 불어갈 때마다,

꽃들은 소스라치듯 세차게 몸 흔들며 아우성쳤다.

바람은 낱낱이 꽃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며,

호명된 꽃들은 저요, 저요, 환호하는 것이었다.

저 지천의 개망초꽃들에게 낱낱이 이름이 있었던가.

바람은 거듭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불어가고

꽃들은 자지러지며 하얗게 아우성치는 것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넋을 빼앗긴 내 입에서

무슨 넋두리처럼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 詩人은 좆도 아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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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는 초롱꽃목 국화과의 풀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장 흔하게 관찰되는 귀화식물이다. 일반적으로 두해살이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는 해넘이한해살이이다. 꽃 모양이 마치 계란 프라이처럼 생긴 데에서 일명 계란꽃이라고도 부르는데 한글명 개망초는 망초에 자를 더한 것으로 망초와 비슷한, ‘망초의 가짜, ‘망초의 사이비란 뜻이다. 구한말 서구로부터 유리그릇이 수입되면서 그릇이 깨지지 않게 사이사이에 풀 묶음을 넣었는데 그때 따라 들어와 퍼진 것이 망초이다. 북미가 원산이라는 이 꽃이 들어와 퍼지면서 나라가 망했다 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풀망초(亡草)’라 불렀단다.


그 후에 들어온 것이 바로 개망초이다. 미국이 원산인 이 꽃은 먼저 들어온 망초와 그 모양이 비슷하다 하여 앞에 가 붙어 개망초가 되었다. 본디 넓은잎잔풀이라 불렸는데 누군가 망초하고 비슷한 놈이네~~!’라 하며 개망초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만 굳어져 현재 식물도감에도 버젓이 개망초라 되어 있다. 적응 능력이 탁월하여 농촌지역뿐만 아니라 도시 산업지역에서도 흔하게 관찰된다. 국립공원의 자연림 속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개망초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선굉의 시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에서는 이 꽃을 시보다 더 아름답다고 강조한다. 시인은 낙동강 긴 언덕을 따라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본 모양이다. 몇 송이가 모여 있어도 아름다운 꽃이 낙동강을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었으니 장관이 따로 없으리라. 게다가 시인은 꽃들이 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고 인식한다. 어디 그 뿐인가. ‘고 작은 꽃들이 키를 다투며 마구 피어나서 / 바람에 몸 흔들며 푸른 하늘을 받들고 있단다.


시인의 눈에 개망초 군락은 白衣의 억조창생’, ‘한 채의 장엄한 은하’, ‘흰 구름으로 보인다. 그러니 모여서 아름다운 것 가운데 이만한 것 잘 없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이따금 강바람 솟구쳐 언덕을 불어갈 때마다, / 꽃들은 소스라치듯 세차게 몸 흔들며 아우성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바람에 휘어지는 꽃들의 모습을 아우성으로 파악하는 시인의 남다른 감각이다. 그 아우성을 시인은 또 다른 감각으로 풀어낸다.


바로 바람은 낱낱이 꽃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이다. ‘저 지천의 개망초꽃들에게 낱낱이 이름이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시인은 한 송이 한 송이 각각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바람이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니 호명된 꽃들은 저요, 저요, 환호하는 것이, ‘바람은 거듭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불어가고 / 꽃들은 자지러지며 하얗게 아우성치는 것이란다.


군락을 이루어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도 아름다울 텐데,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어지는 꽃들을 자지러지며 하얗게 아우성치는 것으로 파악하는 시인 - 바로 시인만의 남다른 감각이리라. 그러니 그 놀라운 광경에 넋을 빼앗긴시인은 무슨 넋두리처럼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다는데 그 탄식이란 다름 아닌 ‘- 詩人은 좆도 아니여!’이다. 무슨 말일까. 맞다. 시인이 쓴 시의 아름다움을 어찌 바람이 부는 대로 휘어지는 개망초 군락의 아름다움에 비하겠느냐는 뜻이리라.


어느 평자의 말에 따르면 대구 칠곡에 살고 있는 교사 김선굉 시인이 의성의 단밀중학교로 매일 출퇴근 하면서 그 길가 낙동강변에 핀 여러 억만 송이 개망초꽃들을 보고 쓴 시란다. 그러니 어쩌면 억만 송이 개망초꽃들 낱낱의 이름을 불러주는 바람은 선생님인 김선굉 시인이요, 그 호명에 저요, 저요, 환호하는 꽃들은 선생님의 어린 학동(學童)들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이력과 연결한 해석인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시인의 그런 이력이 아니더라도 독자는 충분히 개망초의 아름다움을 읽어낼 수 있다.

사실 마지막 행을 빼고 나면 낙동강 긴 언덕을 따라 피어난 개망초 군락의 아름다움을 느낀 대로 쓴 글이다. 어쩌면 수필의 한토막을 행갈이 해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생활글을 시로 승화시키는 구절이 바로 ‘- 詩人은 좆도 아니여!’란 마지막 행이다. 시인의 탄식이라 했지만 실은 개망초의 말이다. 독자들도 감지했겠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어때? 시인이라는 그대가 쓴 시보다 우리가 더 아름답지? 그러니 시인은 별거 아니여!’가 된다.


‘- 詩人은 좆도 아니여!’라고 시인 스스로 자신을 디스한 말 때문에 시로 승화된 생활글 한 토막 - 개망초꽃 몇 송이만 해도 예쁠 텐데 과장법까지 보텐 여러 억만 송이이니 아름다움을 넘어 장관(壯觀)’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개망초 여러 억만 송이는 분명 시보다 아름다울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시인은 이렇게 또 시로 표현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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