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유순예의 <제비꽃>

복사골이선생 2019. 1. 5. 04:2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00)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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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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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지 않아도 됩니다

서 계신 그곳에서

눈길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한두 번 스친 인연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만나고 만날 것입니다

지금처럼 통하는 날 주저앉아

그대 입김 내가 마시고

내 향기 그대가 마실 것입니다

부허한 기운 거나하게 취하거든

한철만 허락된 삶도 뽐낼만하더라고

그대 머물다 간 자리에 몇 글자 써서

흙으로 덮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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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아테네를 상징하는 꽃이자 성실과 겸손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제비꽃은 제비꽃목 제비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지역에 따라 오랑캐꽃’, ‘앉은뱅이꽃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나라 전역, 주로 들에서 자라는데 잎과 꽃의 형태에 따라 수십 종이 있단다. 꽃은 45월에 피며 짙은 붉은빛을 띤 자주색인데 종류에 따라 색의 농도가 약간씩 차이가 나며 흰색도 있다. 어린 순은 나물로 먹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 꽃말은 겸양(謙讓)이다.

유순예의 시 <제비꽃>은 이 꽃이 화자가 되어 시 속 그대에게 하는 말이다. 화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화자인 제비꽃이 앉은뱅이꽃이라 불릴 만큼 땅에 붙어 있는 자신을 보기 위해 굳이 무릎 꿇지 않아도 됩니다고 공손하게 말한다. 즉 그렇게 다가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저 서 계신 그곳에서 / 눈길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단다. 일부러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아도 키 높이에서 바라만 봐도 좋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키만큼의 높이 혹은 거리에서 눈길을 주고받았더라도 한두 번 스친 인연 /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 만나고 만날 것이란다. 꼭 무릎을 꿇고 다가와 얼싸안고 혹은 코를 대고 향기를 맡고 하지 않아도 그냥 서서 눈길을 주고받으며 맺은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뜻이리라. 그 인연이란 바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지금처럼 통하는 날 주저앉아 / 그대 입김 내가 마시고 / 내 향기 그대가 마시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면 몸도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눈길로 통한 마음 이제 서로의 호흡을 마시며 서로를 받아들인다. 바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리라.


눈길이 인연으로 다시 서로의 호흡을 마시는 것으로 이어져 사랑이 된다. 그런데 부허한 기운 거나하게 취하거든이란다. 부허하다니. 사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썩고 병들어 허황하다는 뜻인데, 그저 마음이 울적할 때, 마음이 편치 못할 때가 아닐까. 그렇게 사는 게 괴롭다고 느껴진다 하더라도, 비록 한철만 피고 지는 자신의 삶이지만 그런 삶도 뽐낼만하더라고 / 그대 머물다 간 자리에 몇 글자 써서 / 흙으로 덮어두겠단다.

한 철 피고 지는 제비꽃의 삶이라도 때로는 부허한 기운에몸을 가누지 못할 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 사이에 그대와 나눈 사랑이 있다. 바로 그 사랑이 있어 짧은 삶이지만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고, 그대가 머물다 간 마음 속 그 자리에 몇 글자 써서 담아두겠다는 것이다. ‘그대 머물다 간 자리는 바로 제비꽃의 마음속이요, ‘몇 글자 써서 / 흙으로 덮어두겠다는 것은 마음속에 오래오래 간직하겠다는 말이다. 제비꽃의 이런 마음 - 그야말로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제비꽃을 보며 어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시인은 남다른 상상력으로 제비꽃과 사랑을 나눴는지도 모른다. 아니 제비꽃이 하는 말을 들었던 모양이다. 시를 읽고 나니 시인의 마음이 참 맑고 깨끗할 것이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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