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성자의 <청매화 피는 날>

복사골이선생 2019. 1. 16. 11:34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11)



청매화 피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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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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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모든 것은 다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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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끝에서 잎새 끝까지

밤새워 눈 맞으며

청매화 피는 소리

새벽 동트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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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뚫고 살갖을 찢고

꽃봉오리가 파열하는 소리

애써 참는 고통의 소리도

소리 있음으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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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매화 피는 날

한 소리가 태어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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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梅花)’는 꽃의 색깔에 따라 백매화, 청매화, 홍매화로 구분하고 겹으로 피는 꽃을 만첩백매화, 만첩홍매화라 부른단다. 그러나 흰 꽃이 피면 흰 감자, 자주 꽃이 피면 자주 감자가 달리는 것처럼 매화의 꽃 색깔이 다르다고 매실 색깔이 다른 것은 아니란다. 어떤 색의 꽃이 피든 모두 매실이고 다 식용이 가능하다. 눈 속에 핀다하여 설중매(雪中梅)라고도 하며 사군자의 하나로 칭송하는 매화인데, 취향에 따라 흰색, 청색 혹은 홍색 중 어느 한 가지 색을 더 좋아한다. 색에서 느끼는 감각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리라.

이성자의 시 <청매화피는 날>에서는 제목 그대로 청매화가 피는 모습을 그려낸다. 시 속 화자는 첫 행에서 숨쉬는 모든 것은 다 소리를 낸다고 단정한다. 물론 숨쉬는행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숨을 쉬는 것으로 파악한다면 첫 행의 전제에 따라 청매화도 숨을 쉰다. 그런데 화자는 단순히 청매화가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라 그 숨소리까지 듣고 있다. ‘뿌리 끝에서 잎새 끝까지온 몸으로 밤새워 눈 맞으며 / 청매화 피는 소리는 화자에게는 새벽 동트는 소리란다.


꽃이 피는 모습은 시각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그런데 시인은 청매화가 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숨쉬는 소리를 알려준다. 아니 화자는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학교의 문학 교육에서는 이런 경우를 가리켜 시각의 청각화라 설명하는데 시를 감상하는 데에 꼭 필요한 개념은 아니다. 그저 청매화가 숨쉬는 소리를 듣는 화자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도 마치 청매화가 숨을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화자의 말에 따르면 청매화의 숨소리는 땅을 뚫고 살갖을 찢고 / 꽃봉오리가 파열하는 소리이다. 봄이 오기 전에 눈 속에서 땅을 뚫고 나오는 싹들 그리고 꽃봉오리란 살갖이 파열하며 꽃이 피어난다. 얼마나 아플까. 화자의 눈과 귀는 청매화가 피어나며 애써 참는 고통의 소리도 / 소리 있음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듣는다. 이를 근거로 화자는 청매화 피는 날한 소리가 태어나는 날이라고 한다.


첫 행의 단정 그리고 전제를 통해 마지막 행에서 한 소리가 태어나는 날을 제시하는데 그 날이 바로 시의 제목 청매화가 피는 날이다. 우리는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눈으로 느낀다. 청매화라면 코를 가까이 해서 향기로도 느끼리라. 그런데 시인은 눈과 코 즉 시각과 후각이 아니라 귀, 바로 청각으로 청매화가 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일반인과는 다른 감각이다. 그런데 시를 읽다보면 정말 청매화가 피어나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물론 굳이 청매화가 아니더라도, 어느 꽃이건 피어나며 숨소리를 내지 않겠는가. 그 많은 꽃들 중에 시인은 청매화를 보며 문득 소리를 느꼈던 모양이다. 시 전편에 흐르는 감각은 청각의 시각화라 하겠지만 청매화라는 꽃의 개화, 즉 한 생명의 탄생이다. 그 이면에는 바로 생명에의 의지가 담겨 있다. 온 몸으로 눈을 맞으며 꽃봉오리가 파열되는 고통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청매화의 생명 의지 - 그것을 시인은 눈으로 보면서 귀로 느낀 것이리라.


꽃이 피어나며 내뱉는 숨소리를 듣는 시인 - 나 같은 무지렁이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 감각이요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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