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장순금의 <사과>

복사골이선생 2019. 1. 13. 05:5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09)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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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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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가 낳은 사과나무의 알, 매끈한 살갗에 태양이 붉은 지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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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육 속으로 빛살은 실핏줄의 여린 길을 터주고

바람은 아득하게 잦아들어

과육 속의 까만 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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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속에서 익어간 시간의 즙

뿌리가 밀어 올려 허공이 익힌 알

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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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농익어 뚝,

떨어져 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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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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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단숨에 땅으로 빨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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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몸속에 손을 넣어 가을은 무수히 사과를 꺼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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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모르는 한국인이 있을까. 한자로 沙果 혹은 砂果라 쓰는 이 과일은 장미목 장미과의 낙엽교목인 사과나무의 열매로 빈파(瀕婆) 혹은 평과(苹果)라고도 하는데 원산지는 발칸반도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지름 510cm정도의 둥근 모양으로 보통 붉거나 노란 빛깔의 사과는 후지(부사), 홍옥, 감홍, 화홍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예부터 한국인의 사랑을 많이 받아 왔는데 알칼리성 식품으로, 칼로리가 적고 몸에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웰빙시대를 맞아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장순금의 시 <사과>는 이 과일을 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농축된 것으로 파악한다. 시인은 사과를 나이테가 낳은 사과나무의 알이라고 한다. 나이테, 즉 사과나무에는 세월만큼의 나이테가 있을 것이니 그만큼 자란 사과나무에 열린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그 알의 매끈한 살갗에 태양이 붉은 지장을 찍었단다. 사과의 붉은빛을 태양이 찍은 붉은 지장이라고 하는 것은 사과 겉에 태양이 담겨 있다는 말이리라.

사과 속은 어떠할까. ‘과육 속으로 빛살은 실핏줄의 여린 길을 터주고 / 바람은 아득하게 잦아들어 / 과육 속의 까만 씨가 되었단다. 태양의 빛이 사과 속으로 들어가 사과 속살이 되고 바람은 사과 속에 들어가 씨가 되었다는 말이다. 한 알의 사과에는 이렇게 태양과 바람이 담겨 있다. 그렇게 태양과 바람을 받아 자란 사과는 나이테 속에서 익어간 시간의 즙이요 뿌리가 밀어 올려 허공이 익힌 알이다.


여기서 시인의 감각이 빛난다. 전체 일곱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1, 5, 6, 7 연이 한 문장씩이다. 그런데 3연의 마지막 행과 이어지는 4, 5연의 구성이 눈에 띤다. ‘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 // 사과, / 농익어 뚝, / 떨어져 또르르 // 땅이 받았다고 하는데 내용상으로 보면 하나의 연으로 구성해도 무난하리라. 그런데 시인은 이를 세 개의 연으로 나누어 놓았다. 3 연의 마지막 행 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은 같은 연의 시간의 즙허공이 익힌 알과 병치되어 있으면서 다시 4 연으로 연결된다. 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 / 사과가 된다.


이를 받아 4연 첫 행에 쉼표까지 넣어 사과,’를 강조하며 제시한다. 그 사과를 수식하는 관형구가 바로 3연의 마지막 행 허공을 먹고 자란이다. 여기서 다시 그 사과가 농익어 뚝, / 떨어져 또르르 // 땅이 받았다고 한다. 2행의 ,’3행에 연결되어야 하지만 행을 달리 했고, 3행의 또르르역시 다음 행에 연결되는 말이지만 행이 아니라 연까지 달리하여 땅이 받았다고 표현해 놓았다. 시각적으로도 분명하게 시인의 의도가 살아나는데 이런 배열은 낭송을 할 때에 행갈이와 연 구분의 맛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 시행과 연을 구분하는 시인의 감각이 참으로 기가 막힌다.

농익어 떨어져 땅이 받았다는 사과를 시인은 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단숨에 땅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표현한다. 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담겨 있는 사과를 땅이 받았다 했으니 화자는 땅이 단순히 사과 알을 받은 게 아니라 그 사과를 키운 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 땅의 몸속에 손을 넣어 가을은 무수히 사과를 꺼내먹었다는 마지막 행까지 무슨 말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농익어 땅에 떨어진 사과를 먹으며 사과에 담긴, 사과를 키운 태양과 바람과 허공을 먹는 것이리라.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다. 그래서 사과를 땅 속에서 꺼내 먹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가을이다.


마지막 행만이 아니라 시 전편에 걸친 시인의 언어 감각 그리고 행갈이와 연 구분의 탁월한 감각에 그만 멍해진다. 특히 3연의 마지막 행과 이어지는 4, 5허공의 젖을 먹고 자란 // 사과, / 농익어 뚝, / 떨어져 또르르 // 땅이 받았다에서는 ,’또르르란 의태어와 의성어까지 참으로 실감난다. 사과 알을 뿌리가 밀어 올렸다는 표현도 그렇지만 사과 알 속에 태양과 바람과 허공이 담겨 있다는 인식이 놀랍고 거기에 시를 구성하는 시인의 감각이 정말 부럽다.


나는 사과를 보면 그저 맛있게 먹는 것만 생각했는데, 시인은 사과를 이렇게 멋지게 표현해 낸다. 사과가 이렇게 멋진 과일이었다니…… 역시 시는 아름답고 그런 시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마음 또한 아름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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