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지하선의 <냉이꽃>

복사골이선생 2019. 1. 15. 10:0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10)



냉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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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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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등처럼 흔들리는 오솔길

내 유년을 키웠던 할머니의 눈물 밥이

하얗게 끓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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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가슴에 통증으로

박혀있던 바늘같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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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장죽(長竹)에서 올라오는

아리고 쓰린 한숨이

굽은 등 위로 어룽지다가

그믐달의 뒤꿈치를 휘감곤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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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개의 바늘이 타고 도는 내 핏줄 속으로

꽃 진자리의 아픔같은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

겹겹의 물결로 굽이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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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는 한해살이 풀이지만 때로는 해넘이살이로 겨울을 이겨내는가 하면, 여름을 중심으로 살기도 하며, 밭두렁, 논두렁, 들녘 초지, 농촌 길가의 야지 등 전국에 분포한다. 그런데 봄나물에 빠지지 않는 냉이는 알아도 냉이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봄나물로만 아는 냉이이니 철이 지나면 그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이리라. 농촌은 물론이요 도심 공원에서도 꽃을 피운 냉이는 한낱 잡초가 되어 뽑혀나가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농촌과 도시 구분 않고 한줌 흙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는 냉이의 그 끈질긴 생명력 하나는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지하선의 시 <냉이꽃>에서는 이 꽃에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 담겨있는 것으로 본다. 시 속 화자는 할머니 손에 자란 사람이다. 화자는 왜 어머니 손에 크지 못하고 할머니 손에 자랐을까. 시 속에 그와 관련한 설명이 없으니 여러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부모가 돌아가셨거나 아니면 헤어졌다거나 어떤 경우이건 부모의 부재 상태이다. 이런 경우 할머니의 입장에서 손주를 키우는 마음이 어떠할까. 애미 없는 혹은 애비 없는 손주를 키우면서 할머니는 딸 혹은 아들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리라.

그런데 조등처럼 흔들리는 오솔길이라 한다. 아하, 할머니마저 돌아가셨구나. ‘조등을 통해 충분히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장례 때 켰던 조등, 그 조등의 흔들림을 화자는 기억하고 있다. 할머니와 함께 했던 오솔길을 걷다보니 마치 꾸불꾸불한 길이 조등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바로 그 오솔길에 냉이꽃이 피었다. 화자의 눈에는 꽃이 아니라 내 유년을 키웠던 할머니의 눈물 밥이다. 그것도 이제 밥이 되기 전 하얗게 끓고 있는 모습이다. 할머니가 손주를 키우며 애끓었을 마음이 드러나고 냉이꽃 하얗게 피어 있는 모습과 겹쳐진다.

화자는 자신을 할머니 가슴에 통증으로 / 박혀있던 바늘같은 나라고 한다. 애비 혹은 애미 없는 손주라면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들 혹은 딸이 가고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아들이나 딸을 생각할 때에도 가슴이 아팠겠지만 손주의 입장을 생각하면 할머니로서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았겠는가. 이를 할머니는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통증이라 했던 모양이요 화자는 할머니의 그런 독백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그런 통증이 밀려올 때마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우며 아리고 쓰린 한숨을 쉬었을 것이요 그 한숨은 늙어 굽은 등 위로 어룽지다가그믐달이 떠오를 때에 더 깊어졌으리라. ‘그믐달의 뒤꿈치를 휘감곤 했다는 표현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았던 할머니의 그 통증을 손주도 감지했다. 게다가 고스란히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생각하고 그리고 할머니를 생각하면 부재의 고통은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었으리라.

게다가 그 할머니도 가고 없다. 그러니 화자는 수만 개의 바늘이 타고 도는 내 핏줄 속꽃 진자리의 아픔같은 /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이 / 겹겹의 물결로 굽이치고 있단다. ‘꽃 진자리의 아픔에서 할머니가 화자를 키울 때 화자의 부모는 없었고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할머니가 느꼈을 아들딸의 부재 속에 손주를 키워야 했던 고통은 고스란히 주름살을 더하지 않았겠는가. 할머니와 함께 했던 그 오솔길을 걷다가 문득 눈에 뜨인 냉이꽃’ - 어쩌면 냉이를 캐던 할머니와 추억도 떠오를 것이지만 할머니는 지금 옆에 없다. 이를 화자는 할머니의 주름진 세월은 꽃 진자리의 아픔 때문이었고, 그 고통이 겹겹의 꽃으로 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화자는 감정에 복받친 슬픔이라거나 가라앉은 기분으로 지난 세월을 추억하지 않는다. 물론 할머니를 생각하며 추억을 말하지만 담담하게, 독자에게 조단조단 이야기를 해 주듯이 해요체를 통해 마치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듯 말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 말투가 더 아프게 느껴진다. 마치 남의 말하듯, 할머니 손에 자라며 바로 옆에서 보고 느꼈던 할머니의 고통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렇지 않겠는가. 이해를 한다거나 공감을 한다 할지라도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할머니의 통증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할머니도 없는 지금, 오솔길을 걸으며 냉이꽃을 보면서 어느 정도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이리라.


눈물 밥’, ‘그믐달의 뒤꿈치’, ‘꽃 진자리의 아픔…… 특별히 눈에 확 들어오는 어휘들이 아님에도 시 속 화자가 느꼈을 할머니의 고통이 전해진다. 그런데 어찌 냉이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을꼬. 이것이 바로 시인의 특수한 체험이다. 시인은 일반인들이 느끼지 못했을 자신만의 체험을 지극히 담담하게 시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 담담함이 더 슬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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