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병기의 <냉이꽃>

복사골이선생 2019. 3. 27. 09:4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26)




냉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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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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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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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가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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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地球)는 어떨 건가

수소탄(水素彈) 원자탄(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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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는 한해살이 풀이지만 때로는 해넘이살이로 겨울을 이겨내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밭두렁, 논두렁은 물론 길가의 야지만이 아니라 도시의 공원이나 풀밭에도 많이 자란다. 그런데 봄이 오면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는 노랫말처럼 냉이를 잘 알면서도 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그러니 봄나물 냉이는 잘 알아도 냉이꽃은 많이들 모른다. 봄나물로서의 냉이는 반기지만 냉이가 꽃을 피울 때쯤이면 모두들 외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꽃을 피운 냉이는 농촌은 물론이요 도심 공원에서도 한낱 잡초가 되어 뽑혀나가기 일쑤이다.

사실 냉이는 먹을 수 있는 약이나 채소를 가리키는 말로, 한자 乃耳(내이) 또는 那耳(나이)를 차자(借字)한 것인데, 한글로는 나, 나시, 나이, 남새, 나생이에서 유래한 아주 오래된 우리 고유의 이름이다. 냉이() 땅에서 새로 생겨난 생명체로 먹을 수 있는 반가운 나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말 그대로 냉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농촌과 도시 구분 않고 한줌 흙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는 풀로 그 생명력 하나는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의 연시조 <냉이꽃>에서는 이 꽃의 생명력을 그려낸다. 사실 일반 독서 대중들에게 가람은 순수 서정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연시조 <난초> 두 연이 오랜 기간 교과서에 수록되어 그 시를 통해 가람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말모이> 덕에 가람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이며 우리말과 우리 문학 연구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사실 가람은 창()으로 불리던 시조를 문학의 영역으로 혁신한 현대시조의 개척자이다. 게다가 단순한 자연 관조만이 아니라 현실적 삶은 물론 비리 고발, 권력의 횡포에 대한 저항 등 사회적 관심이 짙게 깔린 작품도 많이 남긴 시인이다.

시조 <냉이꽃>은 전체 3연의 연시조로 그의 시조집 <가람문선> 후기편(後期篇)에 수록되었는데 이 시를 통해 가람은 전기편(前期篇)<난초>와 같은 자연 관조적인 자세를 벗어나 현실적인 삶 속에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까지 들추어 생명을 강조한다. 1연에서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지극히 사실 그대로 그려낸다. 밤이면 잠을 자야 하고 낮이면 세 때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나 같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때로는 시()도 읊고 싶다는 바람을 토로한다. 즉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욕구는 물론 시인으로서의 욕망까지 드러낸다.

2연에서는 자연의 영원함을 슬쩍 비춘다. ‘지난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그리고 지난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는 꼭 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꽃과 새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는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이를 새롭다고말한다. 물론 작년 봄에 핀 진달래는 졌고 금년에는 새로 진달래가 피어났으니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올 해에 듣는 꾀꼬리 울음소리는 작년의 그 꾀꼬리가 아니리라. 그러나 꽃과 새소리란 면에서는 같다. 그럼에도 새롭다고 말하는 사람들, 바로 자연의 영원성을 모르는 인간의 단견(短見)을 질타하고 있다.

3연에 오면 그야말로 현실적인 문제를 천착하며 자연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먼저 태양(太陽)이 그대로라면 지구(地球)’ 역시 그대로라 전제를 한 후, ‘수소탄(水素彈) 원자탄(原子彈)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라 제시한다. 수소탄과 원자탄 같은 핵무기를 아무리 많이 만들더라도, 즉 현대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계화(機械化) 되어도 냉이꽃 한 잎에 담긴 생명의 귀함에까지는 미칠 수 없다는 시인의 생명사상이다. 사실 냉이꽃의 생명력은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농촌이 아니라 도시 한 복판 보도블럭 사이 한 줌의 흙만 있으면 냉이는 자라고 꽃을 피운다. 시인은 바로 냉이꽃의 그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 - 자연의 힘을 알기에 수소탄이나 원자탄도 어쩌지 못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리라.

평범한 인간이지만 시인으로 살고 싶은 욕망, 자연은 영원하다는 인식 그리고 냉이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내세운 연시조 <냉이꽃>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라든가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난초>의 자연관조 혹은 예찬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일제의 압박과 회유에 흔들리지 않고 난초의 고결함처럼 지식인으로서의 지조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이 담긴 <난초>이다. 그러나 <냉이꽃>에서는 그런 관조와 예찬을 뛰어 넘어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관심까지 드러낸다.

여기서 문학사적으로 혹은 문예미학적으로 <난초><냉이꽃>의 우열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난초>에 머물지 말고 <냉이꽃>과 같은 시조를 통해 가람의 문학적 통찰력의 폭을 더 넓게 이해하라고 권하고 싶다. 분명 가람은 우리말을 지켜내고 우리 현대시조를 일궈낸 한국 현대문학사란 산맥에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산이다.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 같은 무지렁이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난초>도 마찬가지지만 <냉이꽃>을 읽으면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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