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병기의 <난초(蘭草)>

복사골이선생 2019. 3. 31. 14:19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27)







난초(蘭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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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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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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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 난 난초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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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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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孤寂)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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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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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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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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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독서 대중들에게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는 순수 서정 시조시인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오랜 기간 국어교과서에 수록된 시조 <난초>를 통해 이병기를 배웠고, 그것도 마지막 두 연만으로 그의 작품세계가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68년 작고했고 주로 시조를 썼으니 60년대 말 이후 현재까지 문예지에 그의 작품이 거의 소개되지 않은, 과거의 인물인 이유도 있다. 최근 개봉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 <말모이> 속에 몇 컷 그의 족적이 소개되어 잠시 애국지사로서의 그에 대한 관심이 있었으나 여전히 그는 우리들의 뇌리에 서정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7차 교육과정의 몇몇 <문학> 교과서에는 작품 전체를 수록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난초>를 두 연으로 된 시조로 배웠기에 <난초>가 한 작품의 일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국어교과서는 전체 47수의 연시조인 <난초>를 마지막 4 편 두 수만으로 이병기를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수록되었고 그 유명세를 타고 <난초>를 새긴 그의 시비(詩碑)의 경우 교과서에 소개된 두 수만 새겨놓은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앞에 밝혔듯이 <난초>는 전체 47수의 연시조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4편에 나오는 두 수만으로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다. 물론 그 두 수만으로도 난()에 대한 시인의 감각과 정신세계를 엿보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한 작품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작품 전체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가람 이병기는 최남선, 이은상과 함께 1920년대 시조부흥 운동의 주체였고 창()으로 불리던 시조를 문학의 영역으로 혁신한 현대시조의 개척자이다. 그러한 그의 문학을 한 작품 속 일부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으리라.

시를 보자. 전체 4편인데 그 중 앞 세 편에 난초의 개화 과정이 그려지고 마지막 4편에서 난초의 생태를 소개한다. 한 수로 된 1편은 난초개화의 순간이다. 시인이 책을 읽다가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선뜻 깨며 눈에 들어온 것, 바로 드는 볕 그리고 서늘바람과 함께 난초꽃이다. 그것도 두어 봉오리가 눈에 들어온다. 잠깐 조는 사이에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개화한 상태를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으나 잠깐 졸다가 깨었을 때 보았으라.

2편은 난초가 겪는 시련과 함께 향기에 취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바람이 불어 새로 난 난초잎휘젓는단다. 잎이 바람에 부러지기야 하겠는가. 다만 바람에도 휘어지는 난초잎을 바라보는 시인은 마치 자신의 몸이 휘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그러니 잠이 들어 못보면 모르겠지만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겠느냐고 한다. 그만큼 난초를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다가 산듯한 아침 볕이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면 시인은 잠시라도 난초 곁을 떠나지 못한다.

3은 난초의 생장과 함께 시인과 하나가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리고 그 비에 꽃이 졌지만 난초는 다시 한 대 피어나며시인의 마음을 위로한다. 지는 꽃에 대한 아쉬움을 새로 돋는 잎으로 달랜다. 이 정도가 되면 시인과 난초는 이미 하나이다. 그러니 시인도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모양이라 하지 않는가. 시인이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난초는 향을 뿜어 시인에게 다가간다.

4편은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부분, 바로 난초의 생태이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다는 것은 바로 내유외강(內柔外剛), 즉 내면의 강인함과 외면의 부드러움이다. 여기에 자줏빛 굵은 대공하얀한 꽃그리고 구슬처럼 마디마디 달린 이슬까지 더해져 난초의 외양이 그려진다. 시인은 난초가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 근거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는 모습을 제시한다. 난초를 의인화하면서 여기에 시인의 감정까지 이입하고 난초가 깨끗함을 좋아하여 속세의 더러움을 멀리하고 비와 이슬만 받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시인이 바라는 삶인지도 모른다.

흔히 이 작품을 가리켜 섬세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 난초의 아름다움을 신비롭게 형상화했다고 평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조가 가람의 초기시이고 바로 시조의 현대화, 즉 시조부흥 운동에 발맞춰 창()으로 인식되던 시조를 문학예술의 형태로 바꿔놓은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충이나 효 혹은 산수를 읊던 과거의 시조창과는 달리 자연물의 하나인 난초의 생태를 관찰하여 여기에 시인이 바라는 삶의 모습까지 담아 새로운 문학양식으로 승화한 것은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하리라.

가람의 문학작품 전반에 드러나는 것이지만 <난초>에서도 우리말 구사가 눈길을 끈다. 우리는 흔히 햇빛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가람은 햇빛대신에 햇볕이란 단어를 즐겨 쓴다. ‘햇빛에는 밝기만 나타나지만 햇볕에는 밝기만이 아니라 따스함까지 담겨 있다. ‘드는 볕이나 아침 볕모두 밝은 햇빛에 따스함까지 담겨 있는 어휘들이다. 여기에 벌다라는 말의 의미 확장까지 시도한다. 본디 벌다는 식물의 가지 따위가 옆으로 벋다를 뜻하는데 가람은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그리고 하얀한 꽃이 벌고를 통해 나뭇가지가 아니라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벙글다는 의미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글학자로서의 우리말 사랑이 아닐까.

<난초> 전편에는 시인의 난초에 대한 극진한 애정은 물론 그의 통찰력이 빚어낸 난초의 고결한 기품이 잘 드러난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를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난초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물론 청신한 감각으로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가람의 <난초> - 이제 교과서에만 머물지 말고 현대 문명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일깨울 수 작품으로 사랑받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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