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도종환의 <봉숭아>

복사골이선생 2019. 5. 1. 07:46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29)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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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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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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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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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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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鳳仙花)’는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로 흔히 봉숭아라 부른다. 인도 ·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데 우리나라 전역 햇볕이 드는 곳에서 잘 자라며 습지나 쓰레기더미 옆과 같은 나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자란다. 주로 화단에 많이 심는데 4~5월에 씨를 뿌리면 6월 이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은 분홍색 · 빨간색 · 주홍색 · 보라색 · 흰색 등이 있고, 모양도 홑꽃과 겹꽃이 있다.

어린 시절 여름날이면 누나는 화단에 핀 봉숭아꽃을 따서 동생들 넷의 손톱에 물을 들여 줬다. 여동생들은 열 손가락 모두 물을 들였지만 나와 막내는 사내라고 새끼손가락에만 들였다. 누나는 진한 빨간색 꽃만 따서는 색을 곱게 해 준다고 잎까지 섞어 찧었다. 착색이 잘되라고 백반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조금 넣었다. 밤에 잠을 자기 전, 그렇게 찧은 봉숭아꽃 덩어리를 손톱에 얹고 잎으로 감싼 후 실로 묶었다. 그 날은 요와 이불에 묻을까봐 손을 이불 밖으로 내놓고 자야했다. 아침이면 손톱은 물론이요 손톱 주변과 손가락 끝이 지저분했지만 며칠 지나면 손톱에는 맑고 고운 진홍빛 꽃물이 들었다.


도종환의 시 <봉숭아>는 이 꽃으로 손톱에 물들이는 행위를 통해 가버린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다. 시 속 화자의 사랑은 저문 여름 뜨락에 / 엷은 꽃잎으로 만나며 시작된 모양이다. 진한 꽃잎이 아니라 연한 꽃잎이라니 격정적인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서서히 마음으로 다가가는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리라. 그렇게 사랑을 하다보면 어느 날인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 서로 붉게 몸을 섞지 않았겠는가. 봉숭아꽃으로 손톱에 물들이는 행위를 이렇게 육감적일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 붉게 몸을 섞은 이후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었으리라. 그런데 사랑이 가버린 모양이다. 그러니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 열에 열 손가락 핏물자국이 박혀있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서 화자는 한탄을 한다. 그렇다고 떠나버린 사람을 부르는 게 아니다. 둘이 나눈 사랑을 떠올리며 사랑 그 자체를 부른다.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고 묻는 것은 손톱에 물든 봉숭아꽃물이 오래 가듯이 떠나버린 사람이 남겨놓은 사랑이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아 있음을 뜻한다.


사랑하던 임은 가버렸지만 서로 붉게 몸을 섞으며 둘이 나눈 사랑은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문득문득 그 사랑이 그리워 어쩌지 못한다. 그 그리움은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사랑에게 묻는다.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얼마나 아렸으면 떠나버린 사랑을 상처로, 그것도 아리고 아린 상처로 환치했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시인 도종환 - 이 시를 읽다가 문득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그의 시 <접시꽃 당신>을 떠올린다.

​그런데 어찌 봉숭아꽃물이 손톱에 물드는 것을 남녀의 사랑,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 서로 붉게 몸을 섞는 행위로 생각했을꼬. 시인의 상상력에 무릎을 친다. 그런데 시를 다 읽고는 그냥 멍해진다. 내 가슴에 아리고 아린 / 상처로 남아 있는’, ‘서로 붉게 몸을 섞었던 내 사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인도 나처럼 가버린 사랑을 그렇게 그리워했으리라. 다만 시인은 ‘사랑을 그리워하는데 나는 ‘내 사람이 그립다. 사람아, 사람아, 가버린 내 사람아…… 5월 첫날부터 가버린 ‘내 사람에 몸부림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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