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손영의 <왕고들빼기 일지>

복사골이선생 2019. 12. 4. 20:31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231)




왕고들빼기 일지

 

- 손    영

 

잡초들이 모두 뽑혀나간 꽃밭

홀로 살아남은 왕고들빼기

꽃들에 끼어 짐짓 꽃인 척 튼실하게 차올랐다

지친 폭우와 장마에도

질기게 여름을 붙들고 살아남아

성장일지 기록할 사이도 없이

키를 늘리고 가슴을 세우더니

머리에 화관 쓴 듯 꽃대를 주렁주렁 피워 올렸다

백일홍 맨드라미 연신 제 매무새 만지느라 바쁜 틈에

쉬지 않고 꽃술 하늘거리며

허공으로 씨를 날려 보낸다

멀리멀리 날아가 부디 터를 잡아라

지나가는 바람의 갈피에 슬쩍 밀어 넣는다

바람의 등을 타고 멀어지는 씨앗들

노심초사 자식걱정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제 몸 물기를 말려 수척한 왕고들빼기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고

추신을 덧붙인다

내년 꽃밭 주변에는

어미 닮은 잡초들 푸르게 돋아날 것이다

 

 

왕고들빼기는 유럽 원산의 한해살이지만 키가 약 2m까지 신속하게 성장하는 야생에서 나는 상추 종류를 가리킨다. 사람과 함께 다니는 전형적인 터주식생으로 어린잎은 실제 상추를 대신 했다고 한다. 따뜻한 남부지방에 많은데 지구온난화 덕에 점점 북쪽으로 분포영역을 넓혀 요즘은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이름이 왕고들빼기아주 큰 고들빼기로 알지만 실은 우리가 김치를 담가 먹는 고들빼기(Youngia sonchifolia)’ 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속의 종으로 그 모양이 흰민들레방가지똥에 가깝다.

손영의 시 <왕고들빼기 일지>는 이 왕고들빼기의 삶을 보여준다. 여기서 일지란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을 적은 문서 혹은 그날그날의 일을 적은 기록이나 책으로 시의 내용으로 보아 후자이다. 시를 보자. 제목 그대로 왕고들빼기의 삶이다.


시 속에 왕고들빼기가 언제 어디서 날아와 발아되어 뿌리를 내렸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봄 혹은 이른 여름 꽃밭의 잡초들이 모두 뽑혀나갈 때 운 좋게 살아남았다. 꽃밭에 뿌리를 내렸으니 꽃들에 끼어 짐짓 꽃인 척 튼실하게자란다. 그런데 꽃밭의 꽃들보다 왕고들빼기는 성장속도가 빠르다. 그러니 성장일지 기록할 사이도 없이자라서는 금방 머리에 화관 쓴 듯 꽃대를 주렁주렁 피워 올린다. 어디 그뿐인가. 백일홍, 맨드라미…… 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려 연신 제 매무새 만지느라 바쁜 틈에왕고들빼기는 쉬지 않고 자라 꽃을 피우고 씨방을 맺어 드디어 허공으로 씨를 날려 보낸다.’

그러느라 왕고들빼기는 제 몸 물기를 말려 수척해지며 끝내는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러나 자신은 죽어가지만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씨방을 터뜨려 지나가는 바람의 갈피에 슬쩍 밀어 넣어 자식들을 날려 보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바람의 등을 타고자식들이 날아가며 멀어질 때, ‘노심초사 자식걱정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는 한 마디 추신을 덧붙인다’ - ‘멀리멀리 날아가 부디 터를 잡으라고.


시인은 왕고들빼기의 삶을 가볍게 바라보지 않는다. 마지막 한 줄 추신까지 읽어낸다. 그러니 시 속 화자의 입을 통해 내년 꽃밭 주변에는 / 어미 닮은 잡초들 푸르게 돋아날 것이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시인은 지친 폭우와 장마에도 / 질기게 여름을 붙들고 살아남는 이 꽃의 끈질긴 생명력만이 아니라 백일홍 맨드라미 연신 제 매무새 만지는 틈에도 쉬지 않고 꽃술 하늘거리는 생활 혹은 생존의 힘을 보며, 끝내는 바람타고 날아가는 씨앗들을 보며 노심초사 자식걱정하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까지 읽어낸다.

어찌 보면 왕고들빼기란 식물이 꽃밭에서 용케 자라 씨방을 터뜨리는 단순한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의 눈은 단순하지 않다. 그 안에 생명력, 생활력과 함께 자식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그려낸다. 왕고들빼기 - 수없이 만난 이 꽃을 보며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바로 손영 시인과 나의 문학적 상상력의 차이이리라. 시인의 눈은 이렇게 예리하다.

손영의 시 <왕고들빼기 일지>를 읽으며 내가 본 왕고들빼기 잎과 줄기 그리고 노란 꽃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 2019년 어느 시낭송회장에서 손영 시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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