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이영식의 <호랑가시나무>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1:13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1)





 


호랑가시나무


이영식


바위에 칼을 갈고 있었다

아니, 칼날 숫돌 삼아 바위를 갈고 있었다


갈면 갈수록 무뎌지는 칼날

갈면 갈수록 날을 세우는 바위


바윗돌 갈아 거울을 빚어내려는

바람이 있었다


수수만년의 고독,


잎을 갈아 호랑이 발톱을 짓고 있는

가시나무 아래서였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정에는 <호랑가시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한 그루였지만 외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는 호랑이등긁기나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9월이었는데, 이미 붉게 물든 열매 때문에 내게는 그저 아름다운 나무였다. 이듬해 봄에 흰 꽃이 피는 것을 봤고, 연두빛 열매를 맺어 진한 녹색으로 다시 빨갛게 변하는 열매와 함께 육각 꼴의 잎 끝에 붙은 날카로운 가시가 인상적이었다.


이영식의 시 <호랑가시나무>은 내가 본 호랑가시나무를 내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만들어 낸다. 내가 들은 바로는, 호랑이가 등이 가려울 때 이 나무 잎의 가시에 문지른다 하여, 혹은 호랑이도 무서워할 만한 엄청난 가시를 가진 나무라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 어느 지역에서는 그 가시가 호랑이의 발톱처럼 무서워 호랑이발톱나무라고도 한단다.

마지막 연에서 보듯이 시인은 이 나무를 잎을 갈아 호랑이 발톱을 짓고 있는이미지로 그려낸다. 그것도 수수만년의 고독을 통해서이다. 그래서일까, 시를 읽으면 정말 수수만년의 고독이 밀려오는 듯하다. 바위, , 거울, 바람……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이 겹치면서 바위를 갈고, 칼을 갈고, 바위로 거울을 빚어내려는 바람까지 모두가 참 외로운, 그것도 수수만년의 외로움으로 가슴을 울린다.

하긴 외로운 것이 어디 바위나 바람뿐이랴. 바위에 갈리는 칼, 칼날에 갈리는 바위, 바위를 거울로 만드는 바람 그리고 잎을 갈아 호랑이 발톱을 짓는 호랑가시나무처럼 우리네 인간들도 저마다 한 자락 외로움을 품고 있지 않은가.


내 눈에는 아름답기만 한 꽃, 열매, 나무였는데 호랑가시나무가 시인의 감각을 통과하면 이렇게 끝없는 고독으로 그려진다. 그러니 시인이 대단하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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