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본 꽃·나무·열매·풀

윤승천의 <도라지>

복사골이선생 2018. 8. 20. 21:27

시인이 본 꽃·나무·열매· (14)





 


도라지


윤승천


더러는 묏새 더불어 산맥(山脈)을 노닐다가

더러는 더북풀 쓸쓸히

묏골에 뿌리내리기도 하다가

() 많은 피난 벽지(僻地)

인맥(人脈) 되기도 했다가

봄날 천지 묏산에 산에

도라지 꽃 피었다

하늘은 그 길로 피맺히도록 열려 있고

묏새 훨훨 날아 오월이 된다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

이 울어 옐 적막강산에

눈물로 피니 도라지꽃

 

 

시의 제목은 도라지이지만, 사실 도라지꽃을 노래하고 있다. 도라지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이다. 굵은 뿌리는 식용과 약용으로 널리 쓰이고 78월에 흰색과 보라색으로 꽃이 피는데,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여기서 씨앗이 나와 주위는 물론 새들을 통해 멀리까지 퍼진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백도라지라고 하며 꽃이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겹도라지라 한다.


도라지를 먹어보지 않은 한국인이 있을까. 고사리, 시금치, 콩나물…… 등과 함께 제사상에도 오르는 음식이다. 꽃도 마찬가지이다. 여름날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이니 도라지꽃을 모르는 한국인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도라지는 전국에 산재해 피어나는, 아주 친근한 나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승천 시인은 이 도라지에 ()’이 서린 것으로 파악한다.

시 속 화자의 말처럼 산맥, 묏골, 벽지, 묏산 …… 산에 도라지꽃이 핀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꽃이기에, 화자는 우리 영토의 역사적 맥락과 함께한 것으로 파악하여 한국인의 ()’의 역사에 빗댄 것이리라. 이런 시각이 이어져 () 많은 피난 벽지(僻地)’에도 꽃이 피어나고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그 씨앗은 묏새들에 의해 그 길로 피맺히도록 열려 있어 산지사방으로 퍼질 것이고, 그 묏새들이 훨훨 날아 오월이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 역사 속 한()이 현대사의 ‘5과 연결이 되어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이 울어 옐 적막강산에도라지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행갈이의 묘미를 볼 수 있다. ‘봄날 천지 묏산에 산에 / 도라지 꽃 피었다는 앞에 열거한 산맥, 묏골, 벽지에 이어 묏산에가 나오고 이들을 묶어 행갈이 후에 산에 도라지 꽃 피었다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시인은 산에를 그 앞 행에 붙였다.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 / 이 울어 옐 적막강산에에서는 행갈이의 또 다른 맛이 난다. 언뜻 보기에는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이 / 울어 옐 적막강산에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시인은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이라 제시하고 한 박자 쉰다. 그리고 조사 를 다음 행으로 넘긴 것이다. 이는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산마을에 끝없이 달고 뜨거운 마음을 제시해 놓고, 다음 행에서 라는 지시어를 내세워 다음에 오는 울어 옐 적막강산에전체를 받는 것이다. 어느 것으로 해석을 하든 그것은 독자의 판단이겠지만, 시인은 이렇게 행갈이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한의 역사를 간직한 강토 곳곳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그렇기에 시인은 한 서린 우리 강토 어는 곳이든 도라지꽃이 피어난다고 강조하는 것이요, 도라지꽃을 보며 바로 과거만이 아니라, ‘훨훨 날아 오월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시를 읽으면 보랏빛 도라지꽃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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